물푸레 촛불 그해 겨울딱 한 번광화문에 올라갔다진눈깨비 오는 날 대부님나그리고 미카엘라이렇게 셋 우리 작게아주 작게들었다보탰다 시작 메모성체를 모신다. 작은 밀떡 쪼가리지만, 아무 맛도 없지만, 지극히 단순하지만 영혼에 기쁨을 주고 힘을 준다.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가난을 청한다. 내 비록 내 돈 벌어 내가 쓴다지만 맛난 음식 먹는 것도 죄요, 멋진 옷 입는 것도 바로 죄요, 귀에 좋은 노래, 달게 자는 잠 또한 죄가 되려니와. 한가할 ‘한’, 늙을 ‘로’, 한가하게 늙는다는 이 이름 석자야말로 더더욱 죄스럽구나. 아직 늦지 않았으니
콤포스텔라 2 아아나 같은 새끼도거기갔다 왔네 시작 메모내가 나를 진정 무참히 짓밟을 때 찌그러뜨릴 때 나는 얼마나 깨끗한가 맑은가. 나는 이제야 시다운 시를 가지게 됐습니다. 나는 내 시 중에서 이 시가 가장 자랑스럽습니다. 신춘문예 당선작 보다도, 다른 사람들 어떤 시보다도 자랑스럽습니다. 내게서 이런 시는 앞으로 또 나오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나는 내 시집 전부보다 이 시 한 편을 사랑합니다. 기뻐합니다. 자주 이 시를 떠올리며 짧지만 아주 오래오래 읽습니다. 아아, 나 같은 새끼도 이런 시를 썼습니다.
콤포스텔라 1 우리는 얼마나 부유한가얼마나 가난하지 못한가먼 들판에 별, 콤포스텔라부르트고 깨지며 걷습니다노란 화살표 달고조개껍데기 달고얼굴엔 애법, 먼지 수염 덥수룩눈 뜨면 걷고밥 먹으면 갑니다바위틈바구니 으슥한 잡목 구렁오줌똥 누고 나서또 걷습니다 지긋지긋하게사람들이 싫어지고온통 말이 싫어지고네깟놈이뭐냐 네깟놈이뭐냐마음속 숱한 헐뜯음솟구치던 미움들조차 하나하나 역겨워집니다왜 이렇게 걸어야 하나 꼭 이렇게 가야만 하나조용히 국으로다 찌그러져 있는 건데마침내 떨거지가 되어너덜너덜 저절로 갈 때빛나는 황토 발 두 짝들판 별이 됩니다
모세야, 우리 열공해서 인서울하자 네가 꼬부리고 잠든 새벽 정태놈한테 온 쪽지더라그런데 왠지 뭉클하다관양노을실바람소리(우리 아들 아이디 한번 멋지네) 모세야고3 올라온 지도 벌써 두 달이 다 지나갔구나애기 같은 얼굴로 중학교 들어간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젠 길쭉하니 마빡에도 여드름 숭숭, 아름답게 잘 컸구나세월 참 빠르다 착하디착한 모세야어젯밤 네게 손댄 것용서해 다오 정말 가슴 아프다신부님되기싫어요실용음악과갈래요아빠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그렇게 순종하던 녀석이어려서부터 성인 사제가 되겠다고십 년도 넘게 미사하며 기도하던착
아버지 학교 막살았구나 입때껏눈물 콧물도 모르고 헛살았구나용접하고 치킨 튀기고물건 떼 오고 배달하고땀 뻘뻘 흘리며 일만 알 뿐기계처럼 돈이나 벌 뿐 그대들애들 너무 싫어해요요즘은 그러시면 안 됩니다안아 주고 키스하고발 닦아 주고 데이트하고요리도 하고 세탁기도 돌리고아침마다 허그를 감동을 창출하세요부드러운 말에 표정에우리 몸 던져야 합니다웃는 법 우는 법 연습에날마다 고마워요 열 번씩 하기숙제 꼭 하서요 노력하세요여보미안해요 아들아딸아사랑한다 틈만 나면 문자는 꼭 주시겠고뭉툭한 손가락 떨쳐떠듬떠듬 보내세요 배우세요그저 시큰둥 눈 깜빡
오, 영세 언제 적 제자였나온순하고보일 듯 말 듯 다리를 조금 절었지지금은 한쪽에서늘 그릇 닦는 마음으로시를 쓰고시 쓰는 마음으로그릇을 닦는다니그러나 시는 썩 좋질 않기, 오히려그 마음 얼마나 아름다운가끌리는가 떵떵거리는잘난 이들 잘 쓴 글보다도―웃기는 짜장면들,영세가 빨리 좋은 여자 만나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으면아들 하나 낳아꿈에도 그린다는 아버지가 되었으면이따금 영세를 통해 시를 다시 보고곰곰 내 인생 또한 생각해 볼 수 있어참 좋다―영세는 세 살 때 교통사고로 뇌수술을 받아 장애를 안고 살고 있다 그런데 잘 쓰지는 못하지만
겨울, 생극에 가다 갑작스런 강추위에 귀싸대기가 얼얼하다골짜기 야산 억새 더미눈 부스러기에 뒤덮여 반짝이고새로 생긴 생극 추모공원저마다 숨소리 죽인 납골실마치 대학교 도서관 같다망자들 칸칸이 빼곡하다꽃무더기 속에 묵주알 속에 파묻힌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름과 그 길고 짧은 생몰 연대와한창때 스냅사진들읽는다, 짧을수록 천천히(그러나 다들 책 놓은 지 오래된 우리들인데보아하니 먼지나 털어 주는 겔 게다)어렸을 적 늙었을 적 처녀 적 학생 적살았을 때 가장 좋던 시절 택해누구랄 것 없이 활짝 웃고 있으니! 오히려 가슴 애려어정어정 걸어 나
동안(童顔)내 얼굴 속에는가난이 없구나 어둠이 없구나 굴욕이 없구나 망가짐이 없구나 야비함이 없구나 시들어빠짐이 없구나 철저한 짓밟힘 처절한 헤어짐이 없구나 떠내려감이 없구나 미워함, 표독스러워라, 불붙는 증오가 없구나 굵은 뿌리 꿈틀거리는 절규와 절망 아우성이 없구나 욕정의 흙탕물 넘쳐흐르는 엉망진창이 없구나 아픔도 괴로움도 투쟁도 갈등에 찢어짐도 없구나 시샘의 시궁창 악취도 없구나 하다못해 나태와 방종 싸구려 분내도 없구나 내 얼굴 내 영혼 읽을거리가 없구나 수염 뽑히고 침 뱉고 모욕이 없구나 아무리 봐도 기쁘고 성스러운, 모욕
라파엘라 내가 누구예요몇 살이나 먹었나요여기는 어딘가요 어떻게 나가요문 하나 열 줄 모르는구나곱게 늙으셨는데되게도 똑똑하셨는데벌레 한 마리 죽이지 못하셨는데개망할라니욕을 욕을 밥먹듯이 하시는구나그 많던 세상 지식 지혜 다 잊어 버려숟가락이라 여기셨는감안경으로 밥을 떠먹으시네마침내 홀딱 벗곤 가방을 옷이라자꾸 입으시는구랴외로우면, 다 떠나가고 외로움이 뼈에 저미면때갈스러워지는구나 뻔뻔스러워지는구나남사스러버라! 그 가방나도 함, 입고 싶네요 시작 메모추석날 한 친구한테서 전화가 오기를, 시방 밖에 달이 아주 좋다고 거기도 달이 떴냐고,
은화(隱花) 서녘에 해는 노루 꼬리만큼 남았는데 남자는 옹기짐을 지고 아낙네는 얼라를 업고 머리에 곡식 자루를 이고 구불구불 솔맹이 긴 고갯길 오릅니다 아직 시오리는 더 가고 게서 곁길 접어들어 초군길 자욱 더듬어서도 한참 그제야 비로소 마을에 닿습니다 마을이래야 헛간 몇 채와 오막살이 칠팔 호가 고작 그 곁으로는 옹기 가마가 기다랗게 누워 있는 점말 숯말로 천주교 교우촌입니다, 그곳에서 하루 나물죽 두 끼로 때우며 천주를 위해 조석으로 기도하고 사주 구령에 열심히 힘쓰니 나날이 행복합니다, 둠벙골 느더리 정삼이골 삼박골 새미랑이
추모 미사 지금 경제도 안 좋잖아이제 그만둘 때도 됐잖아라고들 하지 마세요, 그리고 거기자꾸 화장실 뒤에서 담배 피지 마세요아유 증말 또다시 4월이 오고하나 하나 하나 하나엊그제 별이 된 그 녀석들나 이 밤 미사성체를 모신다슬픔과 위로의 마음손톱만큼이라도냈으면얻었으면 제발인간 망종은 되지 말았으면 시작 메모미사가 끝나고 독수리 몇몇, 성당 그 화장실 뒤에 모여 뿌시기 한 대들 피며 얘기합니다. 독수리들은 겉은 멀쩡한데 속으로 심한 우울증이나 깊은 정신병을 앓고 있습니다. 난 아무래도 결혼 못할 것 같애. 나도 그래. 그러며 찍찍들
ㅠㅠ, 2015년 11월 12일 1.어두운 바닷속 가슴 아픈 시간들귀기울여 들어보면 그대들 마음은 언제나괜찮아요 ㅎㅎ 왜 이리도 천사 같냐깊은 바닷속 그리운 이름들눈감고 읽어 보면 그대들 영혼은 언제나미안해요 ㅠㅠ 왜 이다지 꽃다울까 나 그대들 위해 그대들에 대해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진정 아파하지 않았으며사랑하지도 그렇다고 싸우지도 못했는데살려 주세요 밝혀 주세요 목이 터져라 외치지도 못하고날뛰는 파도 빤히 바라보면서 우리 어느 누구 하나 뛰어들어 건져 주지 못했는데잘못만, 온통 잘못만 했을 뿐인데 그저 부끄러울 뿐인데이제 보니
방 구들장 신부님 용산으로 밀양 현장으로 강정마을로 삼보일배로투사로 애국자로 농사꾼으로 살았으니뱃놈으로 사제로 머슴으로 내던졌으니맨날맨날 싸우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아니다, 밑바닥에 깔리기 위해이름마저 구들장으로 바꿨으니안중근도마 의사를 존경해서엄청 존경한 나머지왜적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쏘는 동상까지 세웠으니우리나라 곳곳, 골골을 짯짯이 사랑해서너무 사랑한 나머지 본적마저경기도에서 저 전라도 장성 땅으로 파 갔으니그러나 하느님 또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지라하느님께도 이 세상 것본인이 좋아하는 걸루 하나쯤은희생 봉헌해 드려야 했
사순 이마에 한 줌 재를 얹고옷을 찢듯마음을 찢고 시작한다나는씹을 것이다깊은 참회와참회로부터 우러나오는버거운 희생 보속이악습하고 싸움이꿀처럼다디달 때까지나는씹고 또 씹을 것이다썰렁한 나날들칼바람 가랑이 사이로 파고드는저 재미없는 사십 일이그래서나는 좋다 시작 메모이제야 재미없는 것들을 추구한다. 재미있는 사람들, 음식들, 자연들, 책들, 사물들 다 떠나자. 단순하고 말없고 시시껄렁하고 시무룩하고 가까이해야 하나도 이득도 안 되는 사람들, 반복되는 지루하고 긴 길들, 걷고 또 걷는 발, 인내심 필요한 되고 된 사물들, 의자들, 깊이는
들꽃 공소 까짓누무거 진정 작아지니이렇게도기쁠 수가오오이 세상에 나 하나아주 보잘것없음이여 꼬락서니하며! 시작 메모이 시는 첫 행과 끝 행에서 운율을 맞춰 봤다. 기교를 부려 봤다. 써 놓고 보니 우연이랄까 ‘까짓누무거’와 ‘꼬락서니하며’가 비스름히 잘 어우러지는 것 같다. 너무 똑같지도 않고 크게 벗어나지도 않고, 또 앞엣 다섯 소리는 좀 버겁게 뒤 여섯 소리는 좀 가볍게 가고. 그리고 딴에, 그런 기교 트릭을 슥, 묻어 보고자 시어 자체 꼬라지 없는 말들을 갖다 썼다.
무제 어디 가, 성님간만이구나 요한이가 길바닥에 동화책이랍시고 몇 묶음 내다놓고 팔길래뭐랄까? 할매들 시장 모퉁이에 쑥갓이니 시금치 나부랭이니 팔드키 쓰라구만 원을 주자니 성인 같고천 원을 주자니 시인 같아 보이고얼마를 줘야 하나오천 원을 주고 나니 내 맘 다 비운 것 같구나 일전에 개천 공공근로에 나갔다간왜 또 유리조각을 밟아 다치지 않았다냐 비록 남들보다 덜떨어지지만서도전례도 하고 복사도 서고 지역에 방범도 나가고 출석률 하나만큼은 백 퍼센트라! 요한이, 웬만한 인간들 한 트럭보다 훨씬 나아 가끔 여자가 그리운지이 누님 저 누님
오이 고라니 쉼터까지 가면자아,우리 꼭꼭 앉는데 큰 거는나 먹고작은 거는자기 먹고 아, 미카엘라는개뿔도 아닌 내가 뭐라고 시작 메모가재골로 귀촌하고 우리는 평일이면 미동산 임도길을 간다. (농사를 짓거나 소를 키우시는 분들께 너무 면목없다.) 보름달 코스 한 바퀴를 돌면 두 시간 남짓 걸린다. 허름한 옷에 허름한 모자에 허름한 신발에 그냥 호젓하다. 그밖에 것들은 불필요할 뿐이다. 반쯤 가면 고라니 쉼터에 다다른다. 미카엘라는 언제 넣어 왔는지 부시럭거리며 오이 한 개를 꺼내 반을 뚝 분지르곤 비교를 한다. 다음으로 꼭꼭 큰 거는
발가락이 닮았다 아들아나는 네가 공부 못하는 게똥통 학교 다니는 게재수 삼수 공부하고 공부해도대학에 계속 떨어지는 게너무 좋다 그래야 네가 나중 땀 흘려몸으로 벌어먹고피로 벌어먹고 살지그래야만 어디에서 또 누군가머리로 벌어먹고 입으로, 눈으로도 벌어먹지하다못해 마음으로라도 벌어먹고 살 게 아니냐아들아 그래서 나는 네가 골통이라도오히려 기쁘다 우리 머릴 닮지 않고발가락을 닮았으니 전혀아프지 않다 시작 메모어떤 아름다운 분께서 내 시를 말씀하시기를,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 연대의 마음이 담겨 있는 좋은 시들이라고, 특히 이 시 ‘발가
종이컵 시인 비웃지는 마시라나는야종이컵에 시를 쓰는종이컵 시인소공원 벤치 위에구겨질 대로 구겨져한 줄 또는끽해야 두 줄저 꾀죄죄, 일상생활남몰래 찌그린다오파리 모과 구두 말번지 촌충 따위지각 조퇴 염소선생발가락이닮았다 따위혹 누군가 볼세 ㅠㅠ,얼굴 불콰히 노래한다오고달파라 내 영혼그러구러 별처럼 구름처럼 흐르니뉘렇게 짠 손 그득 언젠가 꼭 한 번은 맑게 읽히리무신무신눔, 소리 들어가매 다시금 구겨질 대로 구겨젼나는야 종이컵 시인그러니 가자, 시시껄렁더 작고 여리게 우리 정작아픈 얘기들은 빼고 시작 메모저 시는 10년 전 2011년에
우리 셋 귀때기가 떨어져 나갈 듯 추운 밤동네 싸구려 호프집 그런 데선처음으로 만났구나우리 셋, 나와 마누라와 아들래미어른이니 내 먼저 한 잔고생이 많구먼 당신도 한 잔자, 대학도 떨어졌으니 장하다니놈도 한 잔오리털 파카 속 자꾸만 삐져나오는깃털 풀풀 날리며군대 얘기 학교 때 얘기 왕년에 얘기식구꺼정 술 마시면 미주알고주알 맛있구나트집 잡힐 일 없고 도망갈 사람 없고술값 때문에 머리 안 쓰니 좀 좋으냐대학이 다가 아녀라 공부가 최고 아녀라착하게만 살면 되지라그 구라 어디 가면 누가 또 들어 주냐연신 풀며 쨍그랑쨍그랑 시작 메모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