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오 년 전 봄, 부모님은 생계의 수입원인 잠업(蠶業)에서 손 떼셨다. 섬유산업의 발달로 합성섬유가 대중화되고 누에고치 수매가격이 폭락하면서 뽕밭을 갈아엎고 땅을 묵혔다. 토질이 안정되면 과실나무 묘목을 심을 요량이었다. 휴지기를 보낼 무렵, 시집간 막내딸이 다 죽어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첫차를 타고 달려온 부모님은 시댁 세간살이를 보고 기가 찼는지 방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 아빠는 변변한 직업도 없이 얼굴만 반지르르한 연기 지망생이었다.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아이가 생겨, 나는 어쩔 수 없이 시댁의
작곡하고 글 쓰고 비평하고 가르치고 피아노 연주하고.. 1인 몇역이 아니라 음악가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작업들이다. 필자와 똑같은 활동을 한 음악가는 이미 수 세기 전부터 셀 수 없이 많았지만 그중 대표적인 한 명을 꼽으라면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이다. 중세의 음악가들이야 교회의 고용인이요 기능 음악인으로 매주 찬양곡을 쓰고 오르간을 연주했던 한 고을의 음악담당자(Stadtpfeifer)였다. 합창단을 지휘하면서 예배를 준비하는 게 본분이었으며 고전파음악가들도 별반 다르지 않게 피아노 치고 지
우리의 40년 전처럼 미얀마 뜨거운 땅총칼 든 군인들이 민주주의를 마구 짓밟는구나피를 뿌리는구나하늘과 바다는 푸른 편견을 집어삼킨다부르르 몸과 마음이 떠는 동안무수한 별들이 우루루 쏟아진다거칠 것없이 숨길 것 없이험악하게 쏘고 때리고 찬다뚝뚝뚝 붉은 꽃잎이 떨어진다헐레벌떡 하늘과 바다가 요동친다꽈광꽝 천둥 번개에 놀라 새들이 날아 간다새들을 전송하고 돌아서는데성난 파도가 피 흘리며 부서진다흐물흐물 포말이 인다산자여 따르라그 때 우리들처럼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평생 나가자는 뜨거운 맹세들뜨
나는 작은 바람이 되고 싶었어 나는 바람이 되고 싶었어험한 폭풍도쓸어내리는 폭우도 싫었어작은 바람이 되고 싶었어낮은 언덕을 오르고소녀의 콧잔등을 스치고농부의 땀을 씻기는작은 바람이 되고 싶었어나는 바람이고 싶었어아무도 알지 못해도누군가 알 수 있는작은 바람이 되고 싶었어바다를 건너지도풍차를 돌리지도세상을 바꿀 수는 없어도나는 작은 바람이라도 되고 싶었어
잔설소복소복 눈쌓이듯너를 생각하는 마음도 쌓였지눈이 쌓이면 모든 것들은포근함에 잠들겠지만나는 왜 쓸쓸함에 잠못드는지...시간이 흐른다는 것은하루, 한달, 일년의 역사가 되고쌓였던 눈도 흔적을 지우는데...큰 나무 뒤 해가 들지 않는 곳에군데군데 잔설이 남아봄을 기다리듯...커진 방안에서 잠못이루는 나도마음속 귀퉁이에남아있는 눈처럼봄을 기다리는가 보다.
가득 차있는 잔에는 더 이상 채울 것이 없습니다빈 잔이라야 술을 따를 수 있습니다잡고 있는 것이 많으면 손이 아픕니다들고 있는 것이 많으면 팔이 아픕니다이고 있는 것이 많으면 목이 아픕니다지고 있는 것이 많으면 어깨가 아픕니다주우려 구부리면 허리가 아픕니다생각하는 것이 많으면 머리가 아픕니다품고 있는 것이 많으면 가슴이 아픕니다집착하면 할수록 마음이 아픔니다아는 것이 많으면 걱정이 많아집니다내 것만 챙기면 남이 불행해집니다남의 불행을 통해 나만 행복해지면 사회가 불안합니다촛불 속에는 이미 태극기가 있는데태극기는
어떤 자서(自序)이젠다 글렀지만, 텄지만그래도 끙끙굵고 뜨겁게쓰고 싶다누고 싶다내 친구 문달이처럼기술 하나 부리잖고퉤퉤,때 빼고광 내잖고 시작 메모두 번째 시집 『퉤퉤』를 준비하면서 그 시작을 이렇게 하기로 했다. 제목과 자서로 쓸 게 이것저것 참 많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 버리고 말았다. 기술 하나 부리잖고 쓴다는 게, 자칫 껍적거리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애려운가. 지성의 중산층화, 감성의 중산층화, 감정의 중산층화, 영혼의 중산층화, 윤리의 중산층화, 신앙 하다못해 가난의 중산층화까지, 싫고 구역질 난다. 모르면 몰라도 내가
이들은 엉망인 하루를 보낼 거야 은밀하게 허리에 빨간 줄을 그은 이들 탐닉하는 얼룩이 번지고 또 번지게 될 거야지겹다고 멈출 수는 없지 머물다가 돌아갈 거야 세상은 네모난 것이라고 중얼거릴 거야평평한 도로밖에 발견하지 못하고둥근 것은 동전 뿐이라고세모난 얼굴을 향해자꾸만 뿌려줄 거야 지진을 피하다가 무너지는 사람 틈에서사랑하는 사람을 발견할 거야 그러다 지긋지긋한 대물림을되갚아주지 못하게빨간 선을 또 다시 그어줄 거야 또 다시 갈라진 틈에 발바닥을 끼우며주운 동전들을 모아 세모난 집터를 찾겠지나는 그 집에 살지 않을 거야 각진 성냥
현충원에 가면 현충원에 가면죽음에 이유가 없다현충원에 가면고민도 고뇌도 고통도 없다현충원에 가면불운도 불만도 불평도 없다현충원에 가면모든 불행이고자 했던 잠들이 누워있다현충원에 가면누구의 아무도 아닌 운명이 뉘어져 있다현충원에 가면아무의 누구도 아닐 사랑이 엎드려 있다현충원에 가면모두 잠들어 있다
옹기가 놓인 풍경 부엌 뒷문을 열면 장독대가 있었다. 돌로 단을 쌓고 자갈을 곱게 깔았다. 장독대를 보고 딸을 데려간다고 해서일까. 윤기가 반지르르하면 그 집안 주부의 됨됨이나 살림 솜씨를 가늠할 수 있다고 들었다. 채송화로 촘촘히 둘러싸인 장독대는 토담과 어우러진 한편의 정물화였다. 그래서 사계가 모두 멋스러워 보였다. 대청에 누워 액자 같은 쪽문으로 보이는 장독대를 보며 ‘단란한 가족’ 같다고 하니 엄마가 빙그레 웃으셨다. 잔칫날 삼대가 모인 흑백 가족사진처럼 독, 항아리, 동이, 자배기, 시루, 소래기 등 갖가지 옹기들이 오순
왁자지껄 시끌벅적하던 소비가 멈추고회사 근처 폐업하는 식당이 늘어난다정의를 외면하는 무지의 언어 마구 뿌려지지만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겨울의 끝이 보인다꽁꽁 얼었던 흙 돌 길 나무 풀 계곡 기지개 켜는구나저 언 것들 얼었을 뿐 죽은 것은 아니었구나온기 남은 손으로 언 것들 쓰다듬으니 낮게 아주 낮게 숨소리 들린다손이 너무 시리다아무리 손 시리더라도 언 것들 일으켜세워야 한다죽지않고 일어난다면 그까짓 손시림이 무슨 대수랴한파경보 발령되는 혹한의 시간 우리는 일상을 동경했다그저 평범한 일상, 그 소중한 시간
그곳은 어때 오빠, 오빠가 간 지도 몇 년이 지났네방학마다 시골에 가면고모부는 소나무와 솔방울로 학을 만들어 주고동생은 내 구두가 이쁘다고 신어보기도 하고오빠, 언니, 동생들과 항상 재미있었지 겨울에 물 빠진 연못은 얼음 언덕이 되어네모난 얼음 썰매를 내게 태워 주었지어린 내가 떨어질까 봐 꼭 안고 타다얼음이 나가 떨어지고 오빠랑 나랑 엉덩방아 찧고물에 다 젖은 바지를 입고도 웃음이 떠나지 않았지 전경대 활동으로 서울로 올라와우리가 걔네들 다 안 막나오빠도 대학생이면서 학생들 막은 걸자랑스러워하던 순진한 오빠무뚝뚝한 친오빠에 비해
물비늘 호숫가에 앉아서해님을 가득 안고물 위를 바라보면물비늘이 반짝 반짝 낮에 보면 은빛 비늘해질녘엔 금빛 비늘반갑다고 반짝 반짝잘 왔다고 짝 짝 짝 짝
책 제목과 표지부터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누님과 함께 하는 알바는 무엇일까? 소설가 김종광은 '원래 짧디 짧았던 소설의 진면목이 여기 다 있다'고 말했다.이 책에는 서른세 편의 스마트소설을 담고 있다. 각각의 이야기는 얼굴이며, 어느 얼굴을 마주하던 독자들은 소설 얼굴에 취할 수밖에 없다. 왜 독자들은 얼굴을 대하고 취하게 될까?소설가 김종광은 스마트소설 '누님과 함께 알바를'은 '인식의 반전으로 조율된 이야기들이 매우 독특한 서사적 세계를 선사하기 때문이다'라고 밝혔으며 전성태 소설가는 이 허구의 빛으로 읽히는 스마트소설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 을 보면 이름이 참 독특하고 시적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대다수 인디언은 삶의 경험이나 품성, 자연이나 상황을 묘사한 이름을 지으며 성도 없이 자연에 결속되었다. 주먹 쥐고 일어서서, 머릿속의 바람, 발로 차는 새, 그리고 영화 제목이기도 했던 ‘늑대와 함께 춤을’도 사람 이름이었다. 길지만 멋진 의미가 있었다. 한때 네티즌 사이에서 인디언식 이름짓기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나의 생년월일을 앱에 넣으니 다음과 같은 이름이 만들어졌다. ‘조용한 황소와 함께 춤을’. 피식 웃음이
남들이 사지 않는 그림 남들이 사지 않는 그림을 그려가치도 없고 실력도 없지그래도 알아?남들이 모르는 돌을 굴리는 시시포스타인의 박수는 관심없지자신만이 자기를 믿는 거야남들이 그리지 않는 그림을 그려평가도 평점도 없지그래서 알아남들이 아는 돌을 찾는 시시포스타인의 시선은 돌을 보지만진정한 돌은 내 안에 있지매끄럽든 까칠하든내 속에 박혀구르고 굴러쌓여만 가옮기고 옮겨도쌓여만 가사지도 보이지도 못할양심의 돌들이내 몸에 박혀 숨죽여남들이 몰라도 몰라줘도나만의 돌들은 여전히 굴러세상을 구르다내 안에 숨어작은 한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