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어른이 되는 중이죠- 마혜경 주머니에 시간을 넣는다구멍으로 모래가 떨어지고 쌓여서 시간이 된다떨어진 시간은 모래가 된다모래는 뒤집으면 시간이 되지마시간은 뒤집을 수 없고주머니에 꽂은 두 손은 떨어지지 않은 채아이는 무사히 어른이 된다어른이 된 아이는 어른이 아닐 때가 많다침을 뱉고 어른 흉내를 내지만아주 가끔 어른일 뿐이다사람들이 모래처럼 떨어질 때누군가는 시침으로 나침반을 만들고아이는 꿈을 꾼다떨어질 때마다 키가 크는 아이는 어른이 되어도 아무것도 아닐 때가 많다모래도 시간도 구멍으로 떨어지지만구멍은 떨어지지 않고주머니의
난 핑계를 찾고 있다- 마혜경 밤에게 물었다 어디서 어둠이 물든 거냐고 무엇을 쏟았길래 얼룩이 생겼냐고 별을 표백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태양이 빛나면 발밑에 숨어버리는 그림자도 골목을 걷는 사람들 등에도 어둠이 묻어 있었다 유독 별을 통과한 밤만 깨끗했다 농담을 좋아하나요 밤이 내게 물었다 조금, 사실 혐오하는 편입니다만 그날 누군가를 스쳤는데 그때 으스러졌다며 그의 어깨가 물든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조각 몇 개가 떨어져 구멍이 났는데 빛이 그 사이로 빠졌다며 사람들이 그것을 별이라 부른다 했다나에게 물었다 아니 밤이 나에게
두통-마혜경 물고기를 내려다본다머리가 잘린 채 살아있는 물고기머리를 잘라도 죽지 않는 내가짧아진 머리카락을 만지며파닥이는 지느러미를 내려다본다단발머리가 흔들리고 지느러미가 떨리고머리가 잘린 머리는 죽어간다 잘린 머리카락이 나를 찾는다머리가 잘린 물고기는 날 올려다본다물고기 머리에 머리카락이 자라나고그 머리카락이 나를 찾는다 어떤 머리는 죽고머리를 잘라도 죽지 않는 어떤 머리는 자라난다
거미줄- 마혜경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소설 읽다 잠들어 새벽에 발견한 밑줄처럼간결하고 촘촘하지만 바람이 지나다니는 집 껍데기를 매달아 죽음을 볕에 태우는파티 말고 애도가 한창 진행 중인 곳거꾸로 매달려도 떨어지지 않는 그 집은욕심이 하루만큼이라서어떤 글을 써도 아침이면 빈칸으로 인쇄된다 이슬 속에 태양이 맺혀 문패가 필요 없고거울은 더더욱 쓸모없는주소가 아카시아 줄기와 콘크리트 벽 사이쯤으로 전해지는 이런 집이라면 빈 몸으로 매달려 흔들리고 싶다
멜로드라마-마혜경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다장갑을 벗고 눈을 비빈다소맷부리도 액정을 닦는다흐린 정경이 소매 끝에 붙는다 왼발 뒤꿈치에 나뭇잎이 붙어있다오른발로 밟고 왼발을 든다나뭇잎이 오른발에 붙는다집게로 누르고 오른발을 든다나뭇잎이 집게에 붙는다 넌 의지가 약한 게 흠이야뭐든 잡고 늘어지는 버릇, 나무를 꽤나 흔들었겠어얼마나 홀가분했을까 너의 추락을 모의하는 동안 나뭇잎은 말이 없다할 말을 달라붙는 일에 모두 소모했으므로나뭇잎은 손을 만나 추락한다발을 향한 추락은 추락이 아니다 흐린 정경이 눈동자에 붙는다핸드폰에 담아 주머니에 넣
고양이 모국어- 마혜경 눈동자는 말이 없다긴 수염이 남은 말들을 털어냈다그것이 발톱에 각인 되었다저리가, 멋대로 돌 던지는 사람들에게발은 발톱을 길게 뽑았다세상을 할퀴고 지나갔다그들의 언어는 정제되지 않아자주 숲에 숨는 버릇이 있다 적막한 길에서날카로운 발자국을 읽은 적이 있다눈동자에 오래 머물렀다
우연한 아침- 마혜경 산책 다녀온 연심 씨 손 위에민들레 한 송이 피었네요들판에 뿌리를 두고 홀로 왔다죠그녀가 쪼그려 앉자 발목에 닿은 꽃잎똑똑, 꺾이고도 이렇게 활짝일 수가연심 씨 손에 꽃물이 듭니다 연심 씨 아니 민들레는 노란 부처일까요민들레 아니 연심 씨는 꽃인 걸까요 흰 발우를 꺼내 창가로 갑니다민들레는 아니 연심 씨는 정말 꽃이 될까요
기억의 세탁소- 마혜경 껍데기의 부활만 가능합니다 누구나 절실할 때가 있으니까요 당신은 오염됐나요 그림자와 얼룩 깊이에 따라 세제를 선택하세요 혐오도는 자동 측정되어 세탁 헹굼 과정을 거칩니다 아, 거기 목 뒤의 태그, 제거해주세요 어차피 무시 사항이니까 보관할 기억은 따로 다운로든하는 거 아시죠 기억 분실은 슬픔을 남기죠 이건 팁인데 악몽은 그냥 두세요 한결 가볍죠 당신은 편두통이 있나요 보통 강함 매우강함 중 원하는 탈수를 표시하세요 대개 강함이 무난하지만 내일 데이트가 있다면 보통을 추천합니다 촉촉함은 저희만의 장점이죠 참,
설탕과 소금 사이- 마혜경 그녀는 공모전에서 오백만 원 상금을 받았다한턱낼 땐 좋았지만 계산을 하고 나오니친구들의 질투가 한 눈에 들어왔다아흔다섯 할머니, 손녀를 다독이며 시상에, 설탱이 있으믄 아 소김도 있어야 안 허냐. 그녀의 오백만 원달콤하지만 오늘은 너무 짜다
아픈 손가락을 꺼냅니다-마혜경 어미가 돼가지고 지 새끼를 그라믄 못쓰지어머니가 예원이네 강아지를 안고 왔다어미가 젖을 안 줘 금방 죽을 것 같다는 게 이유다어머니는 방석을 깔고 수건을 덮어주며 보살핀다어미젖을 목 묵어 어쩌긋냐 미음으로 때워야제어머니는 먼저 간 큰아들이 그리운가 보다어미, 개 어미가 되고 싶나 보다
슬픔이 말을 걸다- 마혜경 아무도 말 걸지 않는 카페 구석에서혼자 적막을 지우고 있다어둠을 끌어당기고 밟은 후전류를 환상적으로 퍼트리면벽에 새겨진 적막은 사라지고 더이상 울지 않는다 주인을 떠난 목소리가들어 줄 주인을 찾아간다찻잔들이 소란스럽게 테이블을 오고간다의자가 당겨지고 누군가는 웃는다 적막이 지워진 벽에 이제 슬픔 하나만 남았다강한 전류에도 사라지지 않고빛으로도 지울 수 없는오래된 슬픔이 말을 걸어온다 문이 열리면차가운 바람과 함께 슬픔에 도달해조용한 대화를 하고 싶다
나무를 오해하지 않기- 마혜경 섣불리 베지 마라땅과 나란히 눕지 않겠다중력과 태양에 당당해지기 위해 기도 중이다마른 가지를 보고 손목을 꺾지 마라그 하나로 사라지지 않는다내 끝은 처음이 아니다 어이없게도 밖에서 나를 찾는다면나는 없다계절이 흙에 가득 고이면 밀어낼 뿐이다 너희들의 언어로 말하겠다꽃도 피는 게 아니라 안에서 밀어내는 것이다 어머니도 별도詩도그렇게 밀어서 세상을 만나지 않았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