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놀이- 마혜경 얼마나 좋은지렌즈를 닦고 조리개를 맞춘다불붙은 나무를 마주 본다활활 타들어 가는 순간이 짜릿하니까불씨의 흔들림을 바라본다밤엔 또 얼마나 좋을까재가 되지 않은 사람들이 숲으로 간다숲으로 번진 불이 어둠에 붙는다어둠이 불을 감추고 있다방화범을 숨기고 있다신고할 사람이 없어경찰도 소방관도 오지 않는다불구경이라면 얼마나 좋은지얼마나 달아오르는지
아이를 팝니다- 마혜경 그가 떠나자 그녀는 혼자 아기를 낳았다 아기의 빈 자리에 슬픔이 누웠다 눈물이 이상한 문장을 새기고 있다 아이를 팝니다 36주, 20만 원. 제주도 서귀포시 당근마켓에 올라온 그녀의 글은 눈물이 아니다 동정이라 읽지 않는다그것은 엄마를 가장한 악마. 그녀는 알 것이다 미혼모보호센터와 보육시설로그녀와 아기가 헤어질 때, 아이를 파는 일보다 죄를 파내는 일이 얼마나 더 아픈지를 아기는 아무것도 모른다입양도 모르고 글도 모른다여태 꿈을 꾸고 있어 다행이다
사랑과 장담그기- 마혜경 사랑은 얼마나 손이 가는지 재료만으로 숙성되지 않는다 볕 좋은 날엔 태양을 고스란히 배달해야 하고 미리 비 예보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사랑은 얼마나 예민한지 제 때 문을 열고 닫아야 한다 찬 서리가 주인 행세를 하면 온기가 떨어져 뒤늦게 문을 닫아도 냉정해지기 쉽다 얼마나 어린애 같은지 매일 소리를 듣고 싶어한다 웅크리고 앉아 지난 햇살과 어제 스친 어둠에 대하여 시를 쓰고 있을 때 익숙한 발소리가 다가온다면 사랑은 어린애처럼 펜을 집어 던지고 춤을 출 것이다얼마나 손이 가는지 오늘도 하나의 얼굴만 기다린다
낯설고 높은 - 마혜경 꿈에서 떨어져도 눈물로 베개를 적시던 사람들이 3만 5천 피드를 날고 있다캐리어에 긴 옷과 카메라 수첩을 챙기고하늘을 걷고 있다태양을 가로질러 구름을 둥글게 깎으며낯선 얼굴을간판을의자를 향해 날아간다 겁쟁이들의 이 짧은 표류는 여행으로불리면서 하늘에 이름이 각인된다바람이 먼저 읽을 것이다
무릎- 마혜경 홀로 있는 것들은땅과 나란해야 싱그럽다 들판의 소나무암소가 뜯는 억새풀이글거리는 태양과 빗살무늬 폭우 아래자고로 기울어야 숲이 된다 길상사 초롱불 아래첫새벽 여는 보살의 다리에는삼천 번의 흔들림이 스며있다 두 다리를 접어 마음의 빚 바닥에 털어내오롯이 꺾여야 사람이다
버티고개 - 마혜경 약수동에서 한남동 넘어가는 정상폐지 손수레 위에 태양이 아스라이 앉아있다밀고 끄는 기억과 햇볕으로밥을 지어먹는 노인붉은 태양은 무게를 지우기 위해들숨을 참고 있다 장충동 내리막 길땀에 젖은 노인이 아래로 굴러간다풍등을 닮은 태양이 위로 멀어진다 한 송이 꽃으로 밥물을 재는 사람과낱알로 버티는 꽃망울이 붉에 핀 그곳어쩌면 두 개의 태양이 만나는 곳
바람의 바람- 마혜경 쉴 공간을 찾습니다오래 머물지는 않을게요나뭇잎에 달린 이슬이 손가락을 펼 때까지아주 잠시요 온몸의 실타래를 풀어 하늘을 청소하고별의 겨드랑이를 비누로 닦다가그만 두통이 몰려왔어요 햇살 묻은 머리카락도 좋고요기침에 나풀거리는 스카프파란 핏줄 선명한 발목도 괜찮아요잠시, 잠시만요. 사람도 두통이 있다면서요가끔 벤치에 앉아 쉬는 당신을 봤어요같이 쉴까요아주, 잠시만요.
세일을 세일합니다- 마혜경 없는 게 없는 그곳에 있어야 할 게 없다있어야 할 게 없지만 없어도 그만인 게 있다이를테면, 그것은 발소리다그것은 어떤 두려움이 끌고 온 분위기다얼굴 반을 마스크로 가린 사람이 술래다곁눈질로 기웃기웃 걸어간다신상 원피스에 숨은 마네킹이 제일 먼저 들켰다 주인이 되시면 바로 벗어드릴게요 거스름돈도 충분합니다꼭꼭 숨어라.마스크를 매달고없는 게 없는 그곳을 지나간다있어야 할 사람들을 모두 술래로 만들고쇼핑백을 납작하게 밟고 지나간다 조명 빛이 갇히고 술래는 모두 사라지고 마네킹은 주인을 찾지 못해 원피스를 입고
그리움은 손바닥을 닮았다- 마혜경 허공을 매만지다 젖은 보도블록에 달라붙은붉은 단풍잎을 바라본다 여름의 햇살을 훌훌 털고 떠나버린아버지의 오그라든 손바닥 생각없이 밟다가두 손으로 받쳐 든다
말이 사라지다-마혜경 누구 입가에서 떨어졌을까 주름을 잡고 있지만 앞뒤 구분이 무의미한 상태. 검게 밟힌 자국은 이제 끝났음을 말하고 있다 어떤 말들이 태어나지 못하고 끝난 걸까... 납작하게 묵음 처리된 말들이 회색 주름 아래서 굳어가고 있다 죽음이 최선의 정직인 것처럼.
골목을 사랑하나요- 마혜경 화려한 호텔 금은방 뒤 가느다란 선. 자궁에 공평하게 매달렸던 태아는 세상에 자신만의 길이 있는 걸 알지 못한다 종로 돈의동 사람들도 모른다 정치한다는 사람들만 리스트로 갖고 있는 쪽방촌 길. 어릴 적 골목에서 뛰놀던 소녀는 여든일곱 해를 지내며 닳아버린 무릎에 화석 같은 웃음을 새긴다 밖의 사람들이 반듯한 길을 걸으며 더 반듯하게 굳어간다 한 명의 사람이나 뒷모습을 봐야 하는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같은 인사를 한다 먼저 가세요 어깨를 모로 비켜 골목을 넓히며 탯줄처럼 얇은 길 먼저 가세요 수많은
개와 축구공- 마혜경 누군가 축구공을 세게 찼다 개 한 마리가 달려간다축구공이 굴러가자기를 쓰고 달려간다어느 지점에서 공이 멈추자 개도 멈춘다 개가 본 것은 축구공이 아니다굴러가는 걸 본 것이다세상의 둥근 등을 본 것이다 누군가 축구공을 세게 찼다또 개 한 마리가 달려간다자전의 멀미를 꼬리에 매달고 굴러가고 있다
마스크를 써도- 마혜경 얼굴로 표정을 만들지 않는다눈빛만으로 표정이 된다얼굴 반을 가려도말을 하지 않아도눈으로 마음의 깊이를 잴 수 있다가까이더 가까이멀어질 수도 없지만 이제사라지긴 더욱 어렵다
침묵이 하는 일 - 마 혜 경 수원 영통구 단오어린이공원에 있는 33.4m 높이의 느티나무지난여름 장맛비에 허리가 부러져 속살이 드러났다시청 직원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돌아갔다 아이들이 모여 술래잡기를 한다텅 빈 공간 바람이 문병을 오고햇살이 조용히 왕진을 다녀간 뒤저기 저 눈에 띄지 않는, 그늘진 곳 초록 가지가 오백 년의 손가락을 펴고.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멀리서 보는 사람들은 생살 찢긴 가지 한쪽을 보며 혀를 차다가 제 머리나 가슴을 쓸어보고 그 누구도 상처에 다가가 말 걸지 않았다 얼마 뒤에 사람들이 와서 시멘트로 사이를
눈 감으면 - 마혜경 풀 냄새가 난다풀의 살냄새가 난다새들이 풀을 뜯으면바람이 뒷정리를 한다 눈을 감으면 숲이 된다풀이 풀 다울 수 있고나무가 오롯이 나무로 인정받는살 냄새가 가장 질서정연한 곳. 눈 감으면 숲이 되고숲으로 모든 걸 볼 수 있기에 나는 오래 눈을 감고 숲이 된다
구해주소 - 마혜경 전남 구례에서 폭우로 떠내려가던 소들이간신히 양철 지붕 위에 올랐다이틀 동안 굶은 소들이 비를 맞고 서 있다 물에 잠긴 지붕에서 어미와 새끼가주인 남례 씨를 부르며 울고 있다
이런 남자 저런 여자 - 마혜경 아버지는 뭐하세요스테이크를 단정하게 자른 은행원 그녀아, 사업하십니다고물상도 사업이라는 아버지 말이 떠올랐다 참, 연봉은 얼마죠와인을 마신 그녀의 어깨가 삐딱하다그는 계약직에 어울리지 않은 데이트가 어색할뿐 집은 어딘가요아파트 추종자 콘크리트 그녀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본다저런 여자는 처음이야 어머, 이런 남자도 처음이거든요의자에서 튕겨나간 총총걸음 그녀바삐 뒤따르는 건 12개월 할부 명품백 그가 꺼낸 무기는 이렇다저기요, 계산은 각자 하시죠
가장자리의 기억 마 혜 경 손가락을 베었다지문이 사라졌다다시 찾을 수 있을까 물고기 비늘처럼 균등한 선기억이 기억하고 있을까 넓이를 기억하고 있는 호수는바람을 둥글게 둘레로 밀어낸다바다는 파도의 리듬으로 테두리를 기록한다기억을 믿을 수 있을까 잘린 무늬는 바깥에서부터 채워졌다고스란히 차오른 결은 유독 가늘었다빗살무늬토기 같았던 아버지의 생애 멀리 떠난 아버지의 신발을 신고우리는 더 먼 기슭까지 걸어가곤 했다칼 같은 여의 끄트머리에 도달하자 심장을 베기도 했지만아무도 몰래 사라진 아버지의 무늬종잇장처럼 얇고 날카로운가장 자리의 안부가
남겨진 자들이 살아가는 법마 혜 경 메마른 바람이 고이는 날에는 수목장에 간다푸른 잔디에 서있는 조화가 생의 이쪽과 저쪽을 끊듯 선명하다나무가 된 아버지는 간지럼을 많이 타셨지가지 사이 바람결에 그 웃음 따라 흘러간다 생의 끈이 잘린 노인의 유골이남겨둔 사람들을 이끌고 들어온다검은 사람들의 어깨가 찬송가를 부른다날리는 흙 한 줌에 맺힌 눈물차마 깨뜨릴 수 없어 숨죽이는 순간 살아생전 아버지도 듣지 못한아이 뒤꿈치에 매달린 소리햇살을 꼭 밟고 야무지게 걸어가는 소리
'情' 헤어 마 혜 경 미용실 간 아들이 기분이 상해서 돌아왔어요 늙고 뚱뚱한 미용사가 축 처진 가슴을 머리 위에, 왼쪽 자를 때는 오른쪽 젖가슴을 오른쪽 자를 때는 왼쪽을 올려 스타일을 구겼다나요 아 그래 그녀는 혼자예요 피붙이 아들 하나 있었는데 전역 앞두고 그만 총기사고로 죽었지요 그 이름이라도 남기고 싶어 아들 이름으로 간판을 내걸었다나 이 악물고 살려고 가위를 들었겠죠 머리카락 대신 자신을 안 자른 것만도 다행 아닌가요 말년 군인들이 가끔 머리 자르러 와요 거울엔 아들이 없어요 하늘 구름 밭 속 자유롭게 걷고 있을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