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을 세일합니다- 마혜경 없는 게 없는 그곳에 있어야 할 게 없다있어야 할 게 없지만 없어도 그만인 게 있다이를테면, 그것은 발소리다그것은 어떤 두려움이 끌고 온 분위기다얼굴 반을 마스크로 가린 사람이 술래다곁눈질로 기웃기웃 걸어간다신상 원피스에 숨은 마네킹이 제일 먼저 들켰다 주인이 되시면 바로 벗어드릴게요 거스름돈도 충분합니다꼭꼭 숨어라.마스크를 매달고없는 게 없는 그곳을 지나간다있어야 할 사람들을 모두 술래로 만들고쇼핑백을 납작하게 밟고 지나간다 조명 빛이 갇히고 술래는 모두 사라지고 마네킹은 주인을 찾지 못해 원피스를 입고
그리움은 손바닥을 닮았다- 마혜경 허공을 매만지다 젖은 보도블록에 달라붙은붉은 단풍잎을 바라본다 여름의 햇살을 훌훌 털고 떠나버린아버지의 오그라든 손바닥 생각없이 밟다가두 손으로 받쳐 든다
칼바람이 잘도 부네책에선 이러다 두 뺨에 생채기가 나고가끔씩 바람따라 날아가는 기억을 붙잡으려손을 뻗고그러고 보면 기억은 투명한가봐주머니 속에 든 실삔으로 머리를 고정해자꾸만 뿌듯한 사람인 척 숨을 크게 쉬네들판에 선 것 마냥 바람이 부네쏜살같은 칼바람이부네 그렇게 널 피해 도망가면두 귀에 생채기가 나고바닥에 나뒹구는 머리카락이 너무 많아서금방 나는 들통나버리네이제야 알았었지새하얗게 머리 미는 꿈거울에서 내가 나를 비웃으며 서럽게 웃는 거정수리에 파란 선 그어줬네 나는 온 몸으로 느낌표를 만드는 것모두가 놀라고 어쩌면칼바람 부는 것
달 시를 쓰는 습관 중 하나가 제목을 나중에 붙이는 겁니다.달은 제목부터 썼습니다. 어떻게 쓰여질 지 전혀 감이 안옵니다. 달을 몇 년 몇 달을 품고 다녀야만 했습니다. 왜냐고 물으시면 저도 몰라요. 품고 다닌 달에는 옛날 나를 사랑했던 여인의 얼굴이. 나를 버리고 떠났던 애인의 모습이. 춘정을 못 이겨 찾았던 매음굴의 정사가. 사랑이 사랑 아님을 알려준 여인이 담겼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한가위 달을 보았습니다. 이국의 바닷가에서 달을 머리에 언혀 놓고 사진도 박았습니다. 달만큼이나 둥글게 나온 배가 조화롭게 튀어나왔더군요. 이제
언제 여름이 지나가나 했는데 벌써 가을이다가시지않는 코로나19 위기에 폭우를 동반한 장마와 태풍지난 여름은 잔혹했다일상이 중단된 암흑의 여름더 멈춘 것과 덜 멈춘 것 사이에 희비를 다투고이 또한 지나가리라며 인내하는 시간 사이로진실과 정의를 배반한 요설들이 난무하고분노는 또다른 분노를 일으켜 세우며저주와 저주가 부딪쳐 갈등은 점점 커지는데갈등을 잠재워야 할 권력이 눈치 살피는 동안악을 선이라 우기는 언어들이 혼란을 부추기고호박만 한 잘못은 뒤에 감춘 채좁쌀만 한 잘못 찾아내고 들춰내어요란하게 호들갑떠는 적폐들의
말이 사라지다-마혜경 누구 입가에서 떨어졌을까 주름을 잡고 있지만 앞뒤 구분이 무의미한 상태. 검게 밟힌 자국은 이제 끝났음을 말하고 있다 어떤 말들이 태어나지 못하고 끝난 걸까... 납작하게 묵음 처리된 말들이 회색 주름 아래서 굳어가고 있다 죽음이 최선의 정직인 것처럼.
내가 그런 집에 살았었는데그대처럼 사랑하는 법을 알았으면라이터로불장난 할 일도 없었을텐데내 고집으로 일어난 화재에솜이불이 타고묶어놓은 개들이 짖어서그대가 잠에 깰 일도 없었을텐데밥을 짓고 담배를 피다발등에 재가 떨어져몸이 서두를 때면겨울에만 보이는 별자리에마음 뺏길 일도 없이추운 밤에 이를 부딪치며나는 또 떠나게 생겼어그대에게 배운 걸누구에게 알려줄까 떠올리면몸이 말썽이야나 좀 용서해줘내 입이 거짓말을 담지 않으면허연 반점이 나이것봐 사실은 밥알을 삼키지 않은건데도사람 속눈썹을 붙인 인형이 있다니까쪼르르 달려온 그대는담배를 처음 피
봄비자박자박 똑똑똑발자욱 소리문 두드리는 소리'누구세요? 누가 오셨나요?'아무 대답 없더니아침 햇살 반짝여문밖에 나갔어요.아! 나뭇가지에 물기가껑충 올라왔어요.
해파리가 있는 어항양 옆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여인들은항상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요 담겨있는 게 아니라 참맺혀있는 게 핏방울 따위가 아니라철이 없는 순간들을 채워야궤도는 돌고 돌아오는 신나는 일을 겪고나면내일이 두려워진다니까요 기포가 같은 개수로 떠오르다가여인 하나가 문득 깨어나면여기가 바다인가 싶다가도다른 여인이 길게 늘어져있으면천국인가 싶어서 꿈이 이어지는 걸 보니아직도 이곳은 여름인가봐어항속에 여전한 해파리는죽은 척하며 바깥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새벽에 문득 들려오는 노래에나는 서글퍼지고조금만 푸르스름해진다면정말이고 울어버리
푸르고 푸르러 마냥 푸르러허튼 바람 한줄기 자리잡을 공간 없었다짙푸른 잎은 싱싱하게 세상을 보듬는 줄 알았다녹색 핏방울 뚝뚝 떨어지는 때적폐는 청산의 대상일뿐 협치의 상대가 아니라는쌓이고 쌓인 울분 피토하듯 쏟아내도메아리도 남기지 못하고 잦아든다도대체 어디까지 모두가 인정하는 푸르름이냐짙푸른 나뭇잎 속으로 시든 잎들이 고개 숙이고잎과 잎사이 죽은 잎들이 사열할 때혹독한 바람 불어와 나뭇가지 힘차게 흔들면숨어 있던 썩은 잎들 일제히 우수수 떨어지고마른 가지는 툭툭 부러져 땅 위에 나뒹군다별들도 속삭이다 울고달빛 속에 춤추
윤직원 윤한로(‘직원’이라 함은 거의 옛날 시골 훈장님쯤 되려나)우리 문학 가운데 보물 같은 소설이 있는데바로 채만식「태평천하」입지요거기 주인공 이름하여 윤두꺼비 윤두섭은한때 노름꾼 아버지가 물려준 집과 재산을억착같이 불리고 늘리고 닥닥 긁어모은 덕으루다그 잘난 만석꾼이 됐으며 그러구러이제 한창 구한말 나라가 무너져 가고탐관오리, 화적패가 날뛰던 개판 시절이 ‘직원’을 돈으로 삽니다만아무 날 느닷없이 화적을 맞은지라저 피 같은 재산과 재물몽조리 불타고 빼앗기고 맙니다요그리하여 우리 주인공 윤직원 영감님땅을 치며 이렇게 부르짖습니다오
영화 감독 그 아이는 항상 거짓말만 한다그런데 돈은 제때에 갚고 제때에 빌린다그런 웃기는 애가 곪아터진 이야기만 한다고깃집에서 일하는 자신의 순정에 대하여 그럼 또 그림쟁이가 있다고 한다미술은 배우는 게 아니라면서 노트에 누드화가 가득하다남자와 아끼는 밤을 나눈다솔직히 나와 나눠줬으면 싶었는데헤테로의 정의를 모른다 그 사이의 나는 시집을 싫어하게 되었다그렇게 됐다 낭만을 곪아터진 애에게 배웠다책장에 꽂혀있는 시를 찢어 일기장에 붙였다이건 내 작품이라고 싸인을 남기랬다 지겨운 하루의 연속은 회전목마 때문이다교복입고 단체사진 찍는 것은
전설과 어머니옥피리 소리 절절하여 하늘 궁전까지 들렸더라.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말하기를잠못이루는 공주님 잠들게 해달라피리소리 다시 청하였는디피리쟁이 석주 그 청을 들어주었더라.선녀가 고마워하며옥비녀 뽑아줄 제하마 받지 못하고 땅에 떨어뜨리니비녀 그만 깨져 버렸더라.옥비녀 떨어진 자리비녀 닮은 꽃이 피더라.어머니는 생전 쪽진 머리로 사셨다.색경 앞에 앉으시고 대충 얼기빚으로 다듬고이내 참빚으로 매무새를 하시곤꼼꼼히 묶은 다음쪽을 짓고 비녀를 꽂으셨다.빚질 단정히 마친 다음빠진 머리카락도정성껏 다듬어 모아두셨지.한 주먹 모아지면어김없
나팔꽃 여여 김홍관 해님 만나려 밤샘하다가새벽 밝으면 환하게 웃는 꽃 기다리던 반가움 표할 길 없어웃음으로 모자라 소리라도 내려고나팔소리 빰빰빰 울려 퍼지듯하늘 향해 팔 벌려 곱게 피는 꽃 그래도 두고 온 별님 생각에꽃 속에 별 하나 새겨 두는 꽃
골목을 사랑하나요- 마혜경 화려한 호텔 금은방 뒤 가느다란 선. 자궁에 공평하게 매달렸던 태아는 세상에 자신만의 길이 있는 걸 알지 못한다 종로 돈의동 사람들도 모른다 정치한다는 사람들만 리스트로 갖고 있는 쪽방촌 길. 어릴 적 골목에서 뛰놀던 소녀는 여든일곱 해를 지내며 닳아버린 무릎에 화석 같은 웃음을 새긴다 밖의 사람들이 반듯한 길을 걸으며 더 반듯하게 굳어간다 한 명의 사람이나 뒷모습을 봐야 하는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같은 인사를 한다 먼저 가세요 어깨를 모로 비켜 골목을 넓히며 탯줄처럼 얇은 길 먼저 가세요 수많은
참, 참나원!헤어짐은 다시 만남의 기약이라 하셨나요?만남은 헤어짐의 예약이라고도 말씀하셨고요.만해의 시를 다시 읽었어요.불가의 선문답에는 툭 던지는 물음표가 많지요.용서가 뭐냐는 제자의 말에용서할 수 없는 것조차 용서하라는 예수의 선문답이 나와요.열두 사도는 죽음으로 스승의 말씀을 증명하며 용서의 참을 보여주지요. 가롯 유다는 빼고요.저는 지금 큰 딜레마예요.부처님도 알고 예수님도 알거든요.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의 도덕적 가치 갈등이 아니라구요.예수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또 한 번 예수께 못박는 것은 아닐까요?이천 년 전 가롯 유다
백치 윤한로들창 두 개 난 오막살이에늙은 어머니와 단 둘맨발에 너덜너덜한 옷백치 청년 므이쉬낀이 사랑한백치보다 훨씬 더 어리석고더 가난하고 더 못난훨씬 더 백치인 마리남에 집 빨래하고 소 치고겨우겨우 밥 빌어먹지만어느 날 사기꾼 놈팡이한테 엮여 따라갔다간바로 채였지만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다라고 생각하는그것으로도 큰 은혜라 생각하는백치보다 훨씬 더 고결한 아가씨 마리니까짓 것들이 뭐냐, 니까짓 것들이 뭐냐애시당초 이런 마음은 손톱만큼도 먹질 않아마침내 애들이 좋아하고우리 주인공 백치 청년이 사랑했네새들이 좋아하고풀 나무
강하다고 자랑하지마라강하다고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살아 남는 것이 강한 것이다살아남으려 노력하는 당신은 아름답다
누군가 배게 밑에 태엽을 숨겼길래 진득해지는 버릇은 어렵지항상 반 쯤 펼친 책을 뒤집어 쓰던 동생처럼내게 반성문 쓰는 방법을 알려달라 말했던 장난들 중에나를 위한 게 없던 것처럼고장난 시계를 수리하느냐는 질문에네, 라고 대답했던 게 후회되냐고 물었지나는 누굴 위해 사는 게 좋았고올바른 엄마가 되고 싶진 않았지만토다는 사람이 부러웠다고 말하지 않았어내 일기를 몰래 읽어줄 동생이 필요했지남들은 안 먹는 과자를 가방에 넣고방에 숨겨 놓으면 그게 내 글자가 되어가끔씩 너를 찾지,이 많은 걸 누굴 주지시계 바늘이 고장나면 나를 찾아줘잠들 시
개와 축구공- 마혜경 누군가 축구공을 세게 찼다 개 한 마리가 달려간다축구공이 굴러가자기를 쓰고 달려간다어느 지점에서 공이 멈추자 개도 멈춘다 개가 본 것은 축구공이 아니다굴러가는 걸 본 것이다세상의 둥근 등을 본 것이다 누군가 축구공을 세게 찼다또 개 한 마리가 달려간다자전의 멀미를 꼬리에 매달고 굴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