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마혜경 주소가 생겼다숫자를 지우니 좀 더 본질적인오아시스에 딱 맞는 검지손가락 누군가 오랫동안 누른 초인종처럼
저 빛을 보라- 마혜경 젊어서는 처자식을 업고 다녔다그는 별을 읽으며 집에 돌아가곤 했는데그때마다 돌쟁이 아들의 잠꼬대를베고 잠들었다세상이 이율배반적이라고 떠들어도그의 등에 실린 짐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아들은 지 살기에 바쁘고아내는 류머티즘으로 거동이 불편하다 그의 어깨는 언제쯤 가벼워질까세상의 무게 모두 내려와 언제쯤 동그랗게 빛날까
그대 꼬박꼬박 상자에 이름 쓰는가요그게 만약 내 이름이라면변덕이라 칭했던 서로의 추억이그대 나를 잊지 않고 살아줄 수 있나요 이미 약지에 낀 반지가 불에 타버리니태양에 아른거릴 수 없는가요무지개빛이 벽을 타고 흔적 남기는 것을미련하다 말하며 좋아했었는데 벽을 메운 상자 모서리를 조금만 뜯어내니까만 글씨가 쏟아져 내려낱말을 조합해서 내 맘대로 해석한다면그대 곁에 나는 거짓이 되는가요 불행하게도 우리는 서로 너머를 바라보고변화하고도 유리는 새로 나무를 바라보길 내가 그렇게 미쳐가길 바랬는가요 그대 트럭을 모는 기사의 유리를 두들겨상자를
너의 여덟 살, 이제 안녕- 마혜경 9월 14일 오전 11시 16분,인천시 미추홀구의 한 임대주택 2층에서 불이 났다형과 동생은 심한 화상을 입고 중환자실에 입원 중이다 그날 엄마가 있었다면비대면 수업이 아니었다면라면을 끓이지 않았다면아니 배가 고프지 않았더라면 열 살 형은 호전 됐지만 여덟 살 동생은 38일만에 눈을 감았다 신이 다녀간 8년을 뒤늦게 알았다
단풍놀이- 마혜경 얼마나 좋은지렌즈를 닦고 조리개를 맞춘다불붙은 나무를 마주 본다활활 타들어 가는 순간이 짜릿하니까불씨의 흔들림을 바라본다밤엔 또 얼마나 좋을까재가 되지 않은 사람들이 숲으로 간다숲으로 번진 불이 어둠에 붙는다어둠이 불을 감추고 있다방화범을 숨기고 있다신고할 사람이 없어경찰도 소방관도 오지 않는다불구경이라면 얼마나 좋은지얼마나 달아오르는지
망아지를 껴안아주고울분을 토하며 성명서를 낭독한 어제를 뒤로 하고오늘은 반려견 구름이와 눈감아도 떠오르는 산길 걷는다굽이 돌 때마다 한움큼의 추억이 떨어지고뜨거웠던 시간 서늘히 식으며코로나19 긴 터널 가을이 깊어간다생존의 피켓들은 과거에도 모였고 지금도 모이는구나콩 한쪽이라도 서로 배려하며 나눠 먹으면 좋으련만낙엽처럼 돈이 소진되는 거리과로를 견디지 못한 택배 노동자가 죽어가고울긋불긋 단풍같은 자본주의가 춤추는데거룩하게 마감하는 생명들이 우수수 떨어진다누구는 죽이고 누구는 살리는 현실의 아귀다툼누구
가을 오다 가을은 어떻게 오는가?가을은 위에서 내려온다.북에서 남으로 내려오고산 높은 곳에서 아래로 천천히 내려온다.나무 꼭대기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내려온다. 그렇게 내려오는 가을은알록달록 오색 선물을 가지고 온다.선물이 부족 할까봐들판에 황금빛 알곡을 주고나무에 주홍빛 감들을 준다. 가을에 물들어 그 속에 빠지고 싶다.잠깐이라도 가을처럼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싶다. 이렇게 내려온 가을은 넉넉함을 남기고서리가 내려 축 처진 호박잎처럼시린 슬픔으로 떠난다.
아이를 팝니다- 마혜경 그가 떠나자 그녀는 혼자 아기를 낳았다 아기의 빈 자리에 슬픔이 누웠다 눈물이 이상한 문장을 새기고 있다 아이를 팝니다 36주, 20만 원. 제주도 서귀포시 당근마켓에 올라온 그녀의 글은 눈물이 아니다 동정이라 읽지 않는다그것은 엄마를 가장한 악마. 그녀는 알 것이다 미혼모보호센터와 보육시설로그녀와 아기가 헤어질 때, 아이를 파는 일보다 죄를 파내는 일이 얼마나 더 아픈지를 아기는 아무것도 모른다입양도 모르고 글도 모른다여태 꿈을 꾸고 있어 다행이다
사랑과 장담그기- 마혜경 사랑은 얼마나 손이 가는지 재료만으로 숙성되지 않는다 볕 좋은 날엔 태양을 고스란히 배달해야 하고 미리 비 예보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사랑은 얼마나 예민한지 제 때 문을 열고 닫아야 한다 찬 서리가 주인 행세를 하면 온기가 떨어져 뒤늦게 문을 닫아도 냉정해지기 쉽다 얼마나 어린애 같은지 매일 소리를 듣고 싶어한다 웅크리고 앉아 지난 햇살과 어제 스친 어둠에 대하여 시를 쓰고 있을 때 익숙한 발소리가 다가온다면 사랑은 어린애처럼 펜을 집어 던지고 춤을 출 것이다얼마나 손이 가는지 오늘도 하나의 얼굴만 기다린다
신변잡기 윤한로마누라도 작고나도 작고애들도 작고그러니 집도 작고아픔이며 눈물, 콧물, 기쁨시까지 작을 수밖에그래! 우린 늘 쫄며 산다그런데 이렇게 사는 것도나쁘잖습디다, 굳이가난을 배우잖아도 가난하니까선을 배우잖아도 선량하니까겸손을 배우잖아도 겸손하니까, 게다크고 힘센 사람들 여벌로우리 숫제 건드리지 않고 지나치니까이 작은 존재들, 약한 존재들만일 먼저 건드린다면, 깔아뭉갠다면?그땐 불같이 일어서리라타오르리라 사라지리라 찌그러지리라, 궤짝같이흑흑, 늘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시작 메모상상은 아픔의 이불이다. 절망의 우물이다.
낯설고 높은 - 마혜경 꿈에서 떨어져도 눈물로 베개를 적시던 사람들이 3만 5천 피드를 날고 있다캐리어에 긴 옷과 카메라 수첩을 챙기고하늘을 걷고 있다태양을 가로질러 구름을 둥글게 깎으며낯선 얼굴을간판을의자를 향해 날아간다 겁쟁이들의 이 짧은 표류는 여행으로불리면서 하늘에 이름이 각인된다바람이 먼저 읽을 것이다
가로수가 익는다그림자처럼 몰려오는 이튿날의 새벽터미널에는 여섯 사람의 뒤축에 달라붙은 노랑들이어수선한 대화들을 새기고 있다 먹빛 미신을 뒤집어쓴 까마귀들이속이 텅 빈 은행잎들을 열어보인다반으로 접힌 포춘쿠키를 쪼개며잘 익은 운세를 확인하던 아버지 나는 전광판 속에서 한 뼘씩 다가오는 미래를 확인하며불길한 새들의 울음을 뒤축으로 짓이긴다 겨우내 먹을 열매를 숨겨두고 잊어버리는 산짐승들의 습성처럼가을의 마지막 은행잎을 반으로 쪼개놓고는자기가 누구인지 잊어버리곤 하던 아버지이튿날의 무릎에 달라붙은
무릎- 마혜경 홀로 있는 것들은땅과 나란해야 싱그럽다 들판의 소나무암소가 뜯는 억새풀이글거리는 태양과 빗살무늬 폭우 아래자고로 기울어야 숲이 된다 길상사 초롱불 아래첫새벽 여는 보살의 다리에는삼천 번의 흔들림이 스며있다 두 다리를 접어 마음의 빚 바닥에 털어내오롯이 꺾여야 사람이다
버티고개 - 마혜경 약수동에서 한남동 넘어가는 정상폐지 손수레 위에 태양이 아스라이 앉아있다밀고 끄는 기억과 햇볕으로밥을 지어먹는 노인붉은 태양은 무게를 지우기 위해들숨을 참고 있다 장충동 내리막 길땀에 젖은 노인이 아래로 굴러간다풍등을 닮은 태양이 위로 멀어진다 한 송이 꽃으로 밥물을 재는 사람과낱알로 버티는 꽃망울이 붉에 핀 그곳어쩌면 두 개의 태양이 만나는 곳
응, 나 미아가 되었다 왼발이 도망갔다사소한 방랑일까 세 발로 걸으려 할 때마다 애인은 지긋이 손등을 밟았다 헛구역질을 했다끝도 없는 숲이 옆구리를 스쳤다우는 게 아니라,우는 게 아니라,나는 단지 떠나간 균형 감각에 대해 생각할 뿐이야애인에게 사탕을 쥐어줬다뒷정리를 잘 하는 사람이었다배웅을 해주지 못해빈 곳이 시큰거린다고 했다 외딴 집, 덩그러니바람 소리가 새는 낡은 집으로,나아가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숨이 막혔다바람개비를 후후 불면 기분이 좋아졌다 세 개의 날개를 가진 나방이불빛을 쫓아 뛰어드는데,움켜쥘 수 없었다미안해, 나에겐 남
비행기 방귀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비행기가 씽씽비행기 지나간 길에하얀 방귀 자국그건 방귀가 아니야.비행운이야.
바람의 바람- 마혜경 쉴 공간을 찾습니다오래 머물지는 않을게요나뭇잎에 달린 이슬이 손가락을 펼 때까지아주 잠시요 온몸의 실타래를 풀어 하늘을 청소하고별의 겨드랑이를 비누로 닦다가그만 두통이 몰려왔어요 햇살 묻은 머리카락도 좋고요기침에 나풀거리는 스카프파란 핏줄 선명한 발목도 괜찮아요잠시, 잠시만요. 사람도 두통이 있다면서요가끔 벤치에 앉아 쉬는 당신을 봤어요같이 쉴까요아주, 잠시만요.
내 사랑을 핥기잔인하게 거짓을 인쇄하는아버지들이 낳은 잎사귀지긋한 모더니즘 어쩔 줄 모르는나무들이 좋아흙을 품은 지갑내 기침을 부끄러워하기 말머리를 닮은 씨앗들아무것도 흘려보내지 못하는 선풍기내 애정을 취급하는고갯짓 가로젓기파리들이 모여드는 투명어쩌다 손이 시리면내 냄새들을 전시하기 왜 항상멀어지는 숨이곳은 절대 손톱을 손질할 수 없는 계절 잘못된 오타를 품는 것너와 내가 지나치게 많은 우연을 갖는 것도 모두 프로펠러장난스러운 지문이 콕흔적을 남기는 내 시련을 찾아다니기아름답게 내 미래를 질투하기
우리 미래 어둠 투성이지나친 아버지 중심맴맴 돌아 돌고 돌아행방불명 엉킨 꼭지쿵쿵대는 우리 아가손마디 말고 오리발물가 앞이 내 집 마당헤엄쳐라 아가야내 탓하는 내 아버지 가위만 보면 뒤로 누워 울던아버지가 묶다 꼬인 꼭지아직 덜 자랐단다토닥토닥 눈물 없는 우리 아가꼬집혀도 빨개만 지는수두 닮은 내 아가야열이 나면 누구를 원망할까우리 팔자 우리의 병 한 밤 중에 고양이 울음이내 아버지 잠 깨우고손 뻗어서 포대기 더듬으면망태 할멈 왔다 돌아오지 않았지왜 울지 않았니 우리 아가동네방네 맴맴 돌아산 입구에 다다르니개울물에 눌러 앉은눈물 없
천붕(天崩)그리 슬퍼 마세요.가만히 생각하니아버지는 할머니 만나러 가셨는지도 몰라요.엄마 젖무덤 생각에무덤으로 가시는 길이 아닐까요?하늘이 무너졌어도그리 슬퍼 마세요.망자와 산자의 경계는촌각의 시간입니다.그 짧은 시간 동안아버지 생각하며 살다가엄마 젖 만지러 가면 돼요.그리 슬퍼 마세요.배고픈 놈 밥 사주고없는 놈 챙겨주고그러 저러 살다가아버지, 엄마 곁으로조용히 가면 돼요.그래도 서러우면조금만 슬퍼하세요.내가 곁에 있어 줄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