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 마혜경 의왕시 초평동 열여섯에 시집온 김막녀는 열여덟 될 때까지 신랑하고 손만 잡았다 강산이 여덟 번 바뀌도록 소처럼 일했다 밟았다 하면 제 땅이었다 그러나 세 아들이 직업 없이 놀자 붉은 말뚝이 하나둘 꽂혔다 그날도 몰랐다 왕송저수지 앞 노른자 땅이 경매로 넘어간 것을 마을회관에서 곧 죽을 노인들과, 괌에 놀러갈 좀 더 젊은 노인들과 춤을 추었다 내가 도장을 안 찍었는데 무슨 땅이 넘어가 실눈 사이로 검은 눈동자 밤처럼 가득했다 글쎄, 둘째 아들이 찍었다 안 카나 야가 먼 말을 하나 덩실 추는 춤이 엇박자로 엇갈렸다 이거
여서 스님은 바리스타- 마혜경 여서 스님을 뵌 적이 있다아버지 천도제를 보현사에 모셨는데차가 막혀 도착하니 음식 보따리만 기다리고 있었다이를 어쩌나 면목이 없던 차에 차 한 잔하고 가시죠 손수 다기 세트를 꺼내어 물을 끓이신다차를 준비하는 시간이 조용히 흘러간다마음을 차분하게 가다듬고 주변을 돌아본다고요하고 잔잔한 바람이 스쳐간다탕,다기 부딪치는 청량한 소리 커피, 제가 커피를 좋아해요 속세에서 지각한 사람에게 이만한 위로가 또 있을까여서 스님의 커피향 여태 그립다
소설가를 질투하다- 마혜경 이제 난 장편 세 개만 쓰면 끝이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옆 골목 짬뽕이 왜 오백 원이나 내렸을까 다들 궁금하지 않나남편을 살해한 죄수의 딸은 누구의 팔을 베고 잠들까신문에 없는 얘기는 어디에 실릴까 이런 게 궁금한 거야삼인칭 소설은 언제쯤 쓸 수 있을까제길, 자연사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칠십이 넘게 살았는데도 알 수 없어 그가 소설가의 고민을 받아 적다가 멈춘다아, 차라리 소설을 쓸 걸시인보다 말 잘하는 소설가가 될 걸
양화대교를 건너는 법- 마혜경 양화대교를 지나고 있다건너편에 송전탑이 있다는 걸 그동안 몰랐다에펠탑이 아니라면 철골 구조 또는 흉물 안개가 녹슨 표정 몇 개를 지우고 있다작은 각도로 액셀을 밟는다 가까이 다가온다지워지지 않은 선들이 안개 뒤로 숨는다 창을 열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라디오에서 나온 바이올린 소리 멀리 달아난다네 가닥 검은 전선에 올라타 연주를 시작한다검은 새들이 수만 볼트의 전압을 물고 날아간다 어쿠스틱 카페 라스트 카니발* 강을 건너고 있다안개를 지우며 내가 한강을 건너고 있다 *라스트 카니발 - 일본 재즈 뮤지션 '
고립을 향유하다 벌써 작년이 되었다. 도심을 떠난 지도. 지난 연말 이곳 제주도에 내려올 때는 몇 가지 일을 처리하며 생각을 글로 옮기는 작업을 계획했었다. 시간은 약속대로 잘 흘러갔고 생각보다 일 처리도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조용한 제주도는 낯선 사람을 그대로 품었다. 그래서 코로나 분위기에 민폐가 되지 말자는 다짐을 하며 돌아다니는 일보다 고립과 고독을 고집했다. 자발적인 시도 덕분에 깊이 사유할 수 있었고 삶의 무게를 줄일 수 있었다. 제주의 날씨가 나흘 정도 쨍쨍했다면 나머지는 거의 눈이 내렸다. 발목이 푹푹 들어가던 눈이
부재중- 마혜경 벨이 울리자 엄마가 걸어온다밥 먹고 다녀라왜 안 오냐고 말하지만작은 목소리가 오다가 죽어다른 것을 끌고 왔는지도 모른다 아프다는 말이 오다가 아파서 죽고서럽다는 말이 서러워 죽어조심해라 걱정 마라를 끌고 왔는지도 모른다 보고 싶다는 말이 오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죽으면눈물보다 먼저 오는 말 나는 괜찮다 그래서 세상에는일방적인 모른 체와 하소연뿐인 통화가 있는 것이다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야 할 사람이 있는 것이다
아이스크림 주세요- 마혜경 기차에 오른다 중절모 쓴 남자가 오르고 다리를 끄는 할머니가, 엄마 옷자락을 잡은 아이가, 아가씨가 기차에 오른다 스티로폼 박스를 맨 여자가 마지막으로 올랐다 사람들이 표를 들고 있다 뚱뚱한 여자는 표가 없다 오선지 목주름엔 물방울이 맺혔고 박스엔 누런 테이프가 감겼다 왜 표가 없을까 가슴과 어깨에 모서리가 없어서 일까 그럼 그녀는 뭐가 있을까 헤이, 손을 든 남자,헬로, 지폐 흔드는 아가씨 모서리 없는 그녀가 걸어간다아이의 콧등 아가씨의 인중과 남자의 입술을 향해표 대신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들고 이 달러
유치원 가는 어른- 마혜경 방금 내린 커피를 후우 불어본다유리창이 손바닥만 한 입김을풍선처럼 불었다가 삼킨다창밖에 유치원 가는 어른어깨보다 작은 가방을 메고울고 있는 더 작은 손목을 잡고두 개의 까만 머리가 걷고 있다 햇살이 유리창을 지나간다유치원 간 어른이 돌아온다어깨와 손을 그곳에 비우고차박차박 걸어오고 있다 이때 세상이 해야 할 일은그들을 바쁘게 괴롭힐 것서로가 그립지 않게 까맣게 잊을 수 있게잠시 못되게 굴 것
양화대교를 건너는 법- 마혜경 양화대교를 지나고 있다건너편에 송전탑이 있다는 걸 그동안 몰랐다에펠탑이 아니라면 철골 구조 또는 흉물 안개가 녹슨 표정 몇 개를 지우고 있다작은 각도로 엑셀을 밟는다 가까이 다가온다지워지지 않은 선들이 안개 뒤로 숨는다 창을 열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라디오에서 나온 바이올린 소리 멀리 달아난다네 가닥 검은 전선에 올라타 연주를 시작한다검은 새들이 수만 볼트의 전압을 물고 날아간다 어쿠스틱 카페, 라스트 카니발 강을 건너고 있다안개를 지우며 내가 한강을 건너고 있다 *라스트 카니발 : 일본 재즈 뮤지션
서울에 잘 있습니다- 마혜경 버스가 톨게이트를 지날 때마다철렁, 심장 깨지는 소리가 났다옷장 속에서 엄니 돈을 훔친 그는이번에도 안 되면 용산에서 죽을 것이다 서울은 반듯해서 한눈팔면 부러진다는데조금 부러진 사람들을 따라간다 서울 가면 코 베어 간다는 말, 몰라서 하는 소리 그곳에선 주문도 받지 않고 밥을 내온다 가정식 백반집이라고 한다 그는 십삼 년째 밥을 배달하고 있다공짜 밥 한 그릇에 제육볶음, 국수 값이 올라도몇 년째 월급을 올리지 않았다그는 부러지지 않고 밥을 잘 먹고 있다그러니까 용산에서 잘 살고 있다
미안해요, 잠시 웃을게요- 마혜경 모르겠다 그런 이야기는 어떤 이유를 달고 오는지깃을 세우시고 젠틀하게 걸으시던 분부동산 중개소에서 광을 팔다 숨이 멈췄다이영호 씨는 꺼어억, 죽었다고 한다친구들은, 니들도 머지않았다는 이영호를 보고 어 어, 계산은 확실히 하고 가야지 태어날 땐 미리 날이라도 받지이 얼마나 순간의 일인가 세상에서 가장 웃픈 플롯
관계자 외 출입금지- 마혜경 롯데호텔 뷔페 안에서 창밖을 보니제주도 바다가 동그랗게 날 감싸고 있다물항아리 속에 들어앉아 고개만 내민 난 독 안의 쥐 바깥은 낭떠러지가 분명해물 싫어하는 고양이가 언제나 많지세상을 할퀴며 기어 올라오고 있어난 간당간당 머리만 내놓고 그 발톱 끝에 침을 뱉지 겁이 나서 발뒤꿈치만 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