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드라마-마혜경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다장갑을 벗고 눈을 비빈다소맷부리도 액정을 닦는다흐린 정경이 소매 끝에 붙는다 왼발 뒤꿈치에 나뭇잎이 붙어있다오른발로 밟고 왼발을 든다나뭇잎이 오른발에 붙는다집게로 누르고 오른발을 든다나뭇잎이 집게에 붙는다 넌 의지가 약한 게 흠이야뭐든 잡고 늘어지는 버릇, 나무를 꽤나 흔들었겠어얼마나 홀가분했을까 너의 추락을 모의하는 동안 나뭇잎은 말이 없다할 말을 달라붙는 일에 모두 소모했으므로나뭇잎은 손을 만나 추락한다발을 향한 추락은 추락이 아니다 흐린 정경이 눈동자에 붙는다핸드폰에 담아 주머니에 넣
고양이 모국어- 마혜경 눈동자는 말이 없다긴 수염이 남은 말들을 털어냈다그것이 발톱에 각인 되었다저리가, 멋대로 돌 던지는 사람들에게발은 발톱을 길게 뽑았다세상을 할퀴고 지나갔다그들의 언어는 정제되지 않아자주 숲에 숨는 버릇이 있다 적막한 길에서날카로운 발자국을 읽은 적이 있다눈동자에 오래 머물렀다
우연한 아침- 마혜경 산책 다녀온 연심 씨 손 위에민들레 한 송이 피었네요들판에 뿌리를 두고 홀로 왔다죠그녀가 쪼그려 앉자 발목에 닿은 꽃잎똑똑, 꺾이고도 이렇게 활짝일 수가연심 씨 손에 꽃물이 듭니다 연심 씨 아니 민들레는 노란 부처일까요민들레 아니 연심 씨는 꽃인 걸까요 흰 발우를 꺼내 창가로 갑니다민들레는 아니 연심 씨는 정말 꽃이 될까요
기억의 세탁소- 마혜경 껍데기의 부활만 가능합니다 누구나 절실할 때가 있으니까요 당신은 오염됐나요 그림자와 얼룩 깊이에 따라 세제를 선택하세요 혐오도는 자동 측정되어 세탁 헹굼 과정을 거칩니다 아, 거기 목 뒤의 태그, 제거해주세요 어차피 무시 사항이니까 보관할 기억은 따로 다운로든하는 거 아시죠 기억 분실은 슬픔을 남기죠 이건 팁인데 악몽은 그냥 두세요 한결 가볍죠 당신은 편두통이 있나요 보통 강함 매우강함 중 원하는 탈수를 표시하세요 대개 강함이 무난하지만 내일 데이트가 있다면 보통을 추천합니다 촉촉함은 저희만의 장점이죠 참,
설탕과 소금 사이- 마혜경 그녀는 공모전에서 오백만 원 상금을 받았다한턱낼 땐 좋았지만 계산을 하고 나오니친구들의 질투가 한 눈에 들어왔다아흔다섯 할머니, 손녀를 다독이며 시상에, 설탱이 있으믄 아 소김도 있어야 안 허냐. 그녀의 오백만 원달콤하지만 오늘은 너무 짜다
아픈 손가락을 꺼냅니다-마혜경 어미가 돼가지고 지 새끼를 그라믄 못쓰지어머니가 예원이네 강아지를 안고 왔다어미가 젖을 안 줘 금방 죽을 것 같다는 게 이유다어머니는 방석을 깔고 수건을 덮어주며 보살핀다어미젖을 목 묵어 어쩌긋냐 미음으로 때워야제어머니는 먼저 간 큰아들이 그리운가 보다어미, 개 어미가 되고 싶나 보다
슬픔이 말을 걸다- 마혜경 아무도 말 걸지 않는 카페 구석에서혼자 적막을 지우고 있다어둠을 끌어당기고 밟은 후전류를 환상적으로 퍼트리면벽에 새겨진 적막은 사라지고 더이상 울지 않는다 주인을 떠난 목소리가들어 줄 주인을 찾아간다찻잔들이 소란스럽게 테이블을 오고간다의자가 당겨지고 누군가는 웃는다 적막이 지워진 벽에 이제 슬픔 하나만 남았다강한 전류에도 사라지지 않고빛으로도 지울 수 없는오래된 슬픔이 말을 걸어온다 문이 열리면차가운 바람과 함께 슬픔에 도달해조용한 대화를 하고 싶다
나무를 오해하지 않기- 마혜경 섣불리 베지 마라땅과 나란히 눕지 않겠다중력과 태양에 당당해지기 위해 기도 중이다마른 가지를 보고 손목을 꺾지 마라그 하나로 사라지지 않는다내 끝은 처음이 아니다 어이없게도 밖에서 나를 찾는다면나는 없다계절이 흙에 가득 고이면 밀어낼 뿐이다 너희들의 언어로 말하겠다꽃도 피는 게 아니라 안에서 밀어내는 것이다 어머니도 별도詩도그렇게 밀어서 세상을 만나지 않았었나
콜라에 대하여- 마혜경 검은 물결 사이로 희고 작은 방울들쏴아아 쏴아아, 포말을 그리다콧등에서 톡 토독, 심장을 두드리는 소리 누구를 만나든 주저하지 말아라오차 없이 정확하게 목적만을 도려내는비록 속은 안 보여도 뾰족한 맛 짜릿한 바다 멀리 갔나 싶더니 다시 돌아와목청껏 노래하는 달달한 밤하늘톡 토독, 영혼을 갉아내는 소리 칼날 같은제국 같은
이상한 동물원에서- 마혜경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북극곰과 한 남자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최악의 디자인이야 재주 좀 부려보시지두 발로 오래 서있네미련 곰탱이그러나 세 번 중에 한 번은 같은 생각을 한다 세상에나, 쯧쯧쯧 이렇게 서로를 관람하는데티켓은 왜 한쪽에서만 끊어야 할까
내 짝궁- 마혜경 밥 안 먹는 누렁이 발맘발맘 따라가니분홍머리 흰둥이와 폴짝폴짝 꼬리잡기누렁아, 밥 먹어야지 집에 가자 빨리 와 다가가면 도망치고 약 올라 쫓아가니흰둥이 찾아 나온 전학 온 그 아이하얀 손 피아노 소리 콩닥콩닥 발그레
어떤 사과- 마혜경 순녀 씨네 가족은 강원도 큰 언니네 과수원으로 휴가를 갔다 올라오는 날 수고비라며 사과 다섯 박스가 트렁크에 실렸다 뒤에 앉은 딸과 순녀 씨는 도로의 사정에 따라 좌우로 흔들렸다 차가 멈췄다 조금 달렸다 딸의 노래가 잠들었다잠시 후 오른쪽 길입니다남여주 IC로 빠져나오니 이제 길이 뚫렸다 콰과 쾅,추월하려던 대형 크레인이뒤늦게 브레이크를 밟았다차가 반 바퀴를 돌고 멈췄다 순녀 씨와 딸은 아직 모른다사과가 대신 터졌다는 걸여태 사과향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어떤 사과는자신의 쓸모를 다르게 해석한다
시지프스의 무게- 마혜경 신호에 멈춘다한 남자가 횡단보도를 가로지른다수레에 물건이 잔뜩 있다박스는 언제나 궁금하다 쿠쿠 압력밥솥 10인용삼성 김치냉장고대우 식기세척기LG 공기청정기오뚜기 식용유농심 신라면박카스 참이슬 새우깡청송 사과당근주스카스,저게 다 얼마야당장 하나 준다면 식기세척기를 골라야지그러나 누군가 손댄 빈 박스 그의 마누라와 아들 딸에게도새 박스를 뜯는 날이 많았으면 좋겠다 착한 무게를 잴 수 있도록.
질투를 부르는 데이트- 마혜경 토요일 오후였죠 3시를 조금 넘은송도 거리는 신발들로 간지러웠고적당히 소름 끼쳤죠발길 따라 낙엽들의 이정표가 바뀌고어떤 구름은 못 본 척합니다 볼수록 예쁜 건 너 하나뿐.그들의 대화는그가 그녀의 어깨에서 나뭇잎을 하나를떼어내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 순간이 너무 달달해서나무는 화가 났어요홀로 엿듣다 질투가 났답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마혜경 아바 사르나와 노니는 결혼했다분명 재산을 노린 거야,열여덟 살 노니가일흔한 살 아바를 꼬셨다며사람들은 그녀를 의심했다 사랑은 이렇게도 시작된다기름 가게에서 일하는 노니가아바네 농경지로 농기구 기름을 배달하면서둘은 정이 들었다53년의 간격에 기름 한 방울이라도 닿은 걸까 가난한 아바에게서 금 11g과 840만 루피아를 받은 노니 가족은간소한 결혼 준비로 딸의 사랑을 존중했다 멀리 인도네시아에서 건너온 소식에이곳에서도 혀를 차는 사람들이 많다늙은이가 돈으로 매수했어,모두 아바를 의심했다 암만 떠
때로는 -마혜경 손수레가 중앙선을 넘어 역주행하고 있다아, 죽고 싶어? 미친 인간아노인을 간신히 피한 차들이 창문을 열고 같은 욕설을 한다지나가던 한 노인이 달려와노인의 손을 잡고 주변에 수신호를 보낸다 클락션 소리 두 배로 울린다 묻지마라법의 잣대로 따지지 마라누구나 길 잃을 자격이 있지 않나
문틈 사이로- 마혜경 문에 매달려 놀았던 적이 있다열렸다 닫혔다 반원을 그으며발끝으로 벽을 밀고 왼쪽 오른쪽삐걱 쇳소리에 노래를 부르다대문 내려앉는다, 야단을 맞고서야매달린 문에서 내려왔었다 골목에서 문을 보았다한 뼘 정도 열린 틈으로매달리고 싶다는 마음을 매달아본다작게 둥근 선을 그으며 왼쪽 오른쪽최대한 소리소문없이 매달려본다노래도 어떤 소리도 들키지 않아야단치는 사람이 올 수 없다 어떤 틈은 추억을 부른다
배꼽-마혜경 주소가 생겼다숫자를 지우니 좀 더 본질적인오아시스에 딱 맞는 검지손가락 누군가 오랫동안 누른 초인종처럼
저 빛을 보라- 마혜경 젊어서는 처자식을 업고 다녔다그는 별을 읽으며 집에 돌아가곤 했는데그때마다 돌쟁이 아들의 잠꼬대를베고 잠들었다세상이 이율배반적이라고 떠들어도그의 등에 실린 짐은 좀처럼 줄지 않았다 아들은 지 살기에 바쁘고아내는 류머티즘으로 거동이 불편하다 그의 어깨는 언제쯤 가벼워질까세상의 무게 모두 내려와 언제쯤 동그랗게 빛날까
너의 여덟 살, 이제 안녕- 마혜경 9월 14일 오전 11시 16분,인천시 미추홀구의 한 임대주택 2층에서 불이 났다형과 동생은 심한 화상을 입고 중환자실에 입원 중이다 그날 엄마가 있었다면비대면 수업이 아니었다면라면을 끓이지 않았다면아니 배가 고프지 않았더라면 열 살 형은 호전 됐지만 여덟 살 동생은 38일만에 눈을 감았다 신이 다녀간 8년을 뒤늦게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