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29. 02:00촬영이 끝나고 집에 와서 한숨 푹 잤다. 일어나서 가볍게 운동을 다녀왔다. 하루의 일을 돌이켜 보는데 죽는다는 건 뭔지,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아무래도 어제오늘 촬영에서 시체처럼 누워있는 촬영용 더미를 봐서 그런가 보다. 더미란 시체 대용으로 쓰이는 마네킹 같은 것이다. 그 더미가 죽기 직전의 환자 대용으로 누워 있었다. 아무래도 작품 제목이 이다 보니 응급수술이 필요한 장면이 많고 나는 파주에서 숲의 녹색보다 혈액의 붉음을 더 많이 봤다. 근데 죽기 직전의 그 시체 더미,
2023.06.27.01:26독립을 한 지도 어느덧 6개월을 채워간다. 아까는 촬영이 취소되어서 내방 침대에 누워 핸드폰 달력을 보다가 내 월세날을 깨닫고 생각에 잠겼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 돈을 냈구나. 그 돈을 다 모았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했다. 그래도 내 집에 누워서 온전히 내가 일궈 놓은 내 능력과 노력의 작은 결실을 보니 즐거웠다. 월세지만 월세를 내는 동안은 내 집이다. 독립하면서, 아마 그 시점에서 가장 많이 생각한 단어는 '관계'였던 것 같다. 독립이라는 것은 함께하던 무언가로부터 떨어지는 것인데, '독립했다'에서
2023.06.10.아침 일찍 촬영이 끝났다. 집에 가기 아쉬워 근처에 있는 성일이 형 분식집에 들렀다. 나는 실내보다는 외부에 앉는 것을 좋아한다. 날이 좋아 제법 이국적인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옆가게는 카센터이고 마주 보는 배경은 북서울 꿈의 숲이라는, 유월의 녹음(綠陰)이다. 맞은편 꿈의 숲에서 분식을 먹고 있는 나를 보면, 아마 유럽 어느 나라 작은 로컬에 앉아서 브런치를 먹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고 상상한다. 왜 그 스마트폰 필터처럼 손쉽게 보정을 해서 상상으로 나를 본다면, 나는 떡순튀가 아니라 브런치 메뉴를 먹
현주를 기다리며 /김주선 은행거래만 터도 달력을 주던 때와 달리 작년 연말은 달력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종잇값과 제작비가 올라 발행 부수를 대폭 줄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의 푸념을 들었던지 어느 미술협회에 후원금을 지원하는 여고 후배가 탁상용 달력을 우편으로 보내왔다. 달(月)에 어울리는 꽃과 풍경을 그린 달력이었다. ‘구족회화(Mouth and Foot Painting Artists)’라는 작품설명을 보고 나니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가 머릿속 주머니에서 뾰족하게 뚫고 나왔다. 십여 년도 넘은 일이지만, 언젠가 내 고향 신문
2023. 06.01. 01:32아침에 늦게 일어났다. 어제 늦게 까지 친한 형과 이야기를 하느라 귀가가 늦었다. 사실 어제도 늦게 일어났다. 내 기준 08:30분 이후에 일어나는 것은 늦게 일어나는 것이다. 어제 09:30분쯤 일어나서 씻고 수업을 위해 연습실을 갔다. 11:00 수업을 시작했다. 최근에 여행을 다녀왔다길래, 여행과 연기는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대화도 했었다. 주된 수업내용은 인간을 면밀히 보고 인물로 구현하는 것이었다. 14:00 연습실 청소를 하고 자잘한 청구서를 정리했다. 17:00 학교 후배가 연습실에 놀
2023.05.31. 00:49.최근에 내가 출연하는 장편영화 가 개봉했다. 전국에 독립영화를 틀어주는 극장에서 상영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2년 전에 찍고 개봉하고 내가 극장에서 보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린 것 같다. 그동안 나는 많은 작품을 했나 자취를 뒤적여 본다. 2년이라는 시간을 잘 달려온 걸까? 크레딧에 나는 '연규'라는 역할로 나온다. 캐스팅 때는 '실업선수'라는 가칭이 붙어 있었다. 감독님께서 내 프로필에 이름 있는 역할 하나 더 적으라고 만들어주신 것 같다. 이름이 있고 없고는 생명력이 다르다. 이름이
뒷모습 초상화 / 김주선 아버지 장례식 때 쓰인 영정 사진은 초상화였다. 그것도 양복이 아닌 흰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오십 줄의 중년 모습이었다. 증명사진을 확대해 영정으로 사용해도 되었지만, 아버지는 생전에 염원하던 자기 모습을 영정 초상화로 제작해 놓으셨다. 마치 흑백사진인 듯 콧수염 한 올 한 올이 실사처럼 보였다. 아주 오래전 윤중로에 벚꽃 구경을 하러 갔다가 남자친구와 나란히 캐리커처 모델이 된 적이 있었다. 그림을 그려 준 이는 남자친구의 고향 선배였다. 벚꽃 시즌 동안 여의도에서 아르바이트한다며 접이식 의자에 우리를
가을 멍게젓 / 김주선 포항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지인이 제로데이 택배로 횟감을 보냈다. 분당에 있는 종합 버스 터미널 수화물 보관소로 향한 것은 정오였다. 4시간 이상 장거리 배송을 감안해 아이스팩으로 채워진 수화물 상자를 받아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멍게는 껍질이 단단하고 큼직한 놈으로 예닐곱 마리쯤 될까. 탱탱한 돌기 부분을 잘라 낸 다음 살과 껍질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살을 돌려 빼냈다. 빨리 섭취하지 않으면 버리게 될 판이어서 ‘에라 모르겠다 젓갈이나 담가 보자’라는 실험 정신에 빛나는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비싼 해삼은
탕기영감 /김주선 식전바람에 거래처 사장의 부고를 받은 남편은 밥술을 뜨기도 전에 조문 복장부터 차려입었다.“아버지 같은 분이셔. 당신도 알지? Y 철강 김 사장님”이 말인즉슨 당신도 따라나서야 하니 어서 준비하라는 뜻이었다. 상주라도 된 양 상심한 모습으로 수저도 들지 않고 허둥대는 그를 보며 나는 간단한 요깃거리를 주섬주섬 담아 화장기 없는 얼굴로 따라나섰다.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경기도 광주의 한 국도로 접어들었다. 주변에 크고 작은 공장건물이 즐비했다. 그중에 몇 채의 건물을 가리키며 그를 회상하고 나름의 애도를 표시했다. 왜
2023. 05. 21. 19:13어제는 지인이 강사로 있는 연기 학원에 잠시 특강 및 모의 오디션 감독을 하기 위해 다녀왔다. 이렇게 온 게 두 번째다. 커피를 얻어먹고 자리에 착석해서 저번에 했던 것처럼 오디션 참관을 했다. 어떻게 하면 기초적인 오디션 실수들을 줄일 것인가. 어떻게 하면 기억에 남는 배우가 될 것인가. 발성부터 시작해서 신체, 분석까지 꼼꼼하게 의견을 말해줬다. 오디션이든 연기든 정답이 없다. 그래도 못하는 뭔가를 보여주기보다는 매끄럽게 상대방의 기억 속에 자리 잡는 오디션이 잘하는 오디션이 아닐까. 여하튼 무
2023.05.01. 17:40어릴 적 엄마는 시장에 가면 내 손을 자주 놓았다. 지폐도 꺼내야 하고 그야말로 손이 모자라니까. 걸음은 어찌나 빠른지 겨우 걷던 내 발걸음으로 엄마를 뒤쫓아 가기에 턱없이 느렸다. 한걸음 뒤쳐지면 두 걸음 뛰어서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그러다 어느 날 진짜 놓쳐서 시장통에서 길 잃은 아이가 됐었다. 놓친 엄마손을 기어코 다시 찾아서 약지 소지를 겨우 움켜쥐고 올려다보니 다른 아줌마였다. 저녁이 되어서 엄마를 만날 수 있었고, 나는 엄마가 혹시 못 찾을까 봐 그 자리에 있는 가게에 들어가서 한참을 울었
2023.04.25. 18:54.행복은 요즘에 기준하는 것 같다. 어떤 질문을 받고 든 생각이다. '행복하세요?'라고 누가 물어왔다. 머리를 긁적이면서 내 감정이 어떤지 생각해 본다. 행복했다. 그래서 '네, 행복해요. '라고 말했다. 그리곤 '부럽네요. 다행이죠' 하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내 감정에 대해서 들여다본 몇 초 동안 나는 요즘을 돌아왔다. 분명 저번 달은 행복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불행했다고 까지 생각하진 않았지만 여하튼 요즘엔 행복했다. 그렇다면 행복하다는 감정은 요즘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2023.04.16.23:36. 좋아할 때 몰랐던 나. 아침 일찍 촬영장에 가면서 선배님을 모시러 갔다. 집도 가깝고 게다가 가는 길이라 조건이 아주 좋았다. 차에서 냄새는 안 나는지 시트가 지저분하지는 않은지 세차를 할까 말까 고민도 한다. 안전하게 운전해야지 하고 다짐을 한다. 예전부터 선배님의 작품을 보고 감동받은 적도 많았고 감탄하면서 봤던 터라 실례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동안 '나중에 같이 작품에 나오면 좋겠다.'라고 상상했던 것이 실현되어서 더없이 기뻤다. 그리고 촬영장까지 가면서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
2023.04.10. 01:13.몇 달 전부터 컨버스에서 새로 나온 제품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격을 보고는 8만 원이라는 가격을 보고 놀라서 핸드폰을 껐다. 그리 비싼 것은 아님에도 나에게 그 정도 효용이 있는지 고민을 하게 됐었다. 그러다가 당근 마켓에서 같은 종류의 신발이 싸게 나와서 바로 구매를 했다. 딱 한 번 신은 신발이었다. 풀박스 포장까지 새것 같았다. 너무 신나는 일이었다. 사람이 돈 3만 원에 이렇게까지 행복해질 수 있구나 싶었다. 정말 신발을 들고뛰어보자 팔짝하면서 입이 쭉 찢어지게 귀가를 했다. 그러고
2023.03.29. 01:30.이유 같지 않은 이유. 그런 게 있다. 나는 대본을 분석할 때나, 수업을 하면서 하는 질문, 심지어 삶을 살아가며 이유를 찾는다. 이해하려고 하는 것 같다. 왜라는 질문을 던지면 장면을 더 빠르고 깊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 습관이 어느덧 내 삶에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꽤나 만족스러운 습관이라고 생각했고 자주 타인에게도 질문했다. 수업을 하고 면담을 하다 보면 권태기, 권태롭다, 혹은 지겹다는 답을 듣는다. '이렇게 해서 뭐가 될까. 할 수 있을까, 어차피 안될 거 왜 하나.' 등의 말이다. 생각해
2023.03.23.01:34.며칠 동안 엄청난 두통에 시달렸다. 진통제를 먹어도 잠시 그칠 뿐이었다. 지금도 완전히 나아졌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후두부가 지끈거렸다. 머리를 지긋이 손가락으로 눌러봤다. 통증이 왔다. 머리에도 근육이 있나 보다. 머리에 있는 근육이 아픈 것 같았다. 꾸준히 눌러주고 스트레칭했더니 그나마 좀 나아졌다. 가끔 이렇게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처럼, 원인을 알 수 없는 결과가 있다. 나의 직업 군에서 가장 흔한 것은 오디션이다. 어떤 오디션은 너무 못하고 나왔는데 합격 통지를 받았고 또 어떤 오디션은
2023. 03. 17. 10:56머뭇거리는 마음. 동생들과 사소한 농담을 하다가 멈칫하는 나를 발견한다. 짧은 순간 어떤 판단을 한 것 같다. 일종의 자기 검열이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게 적절할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덧붙여 말하자면 내 말이 상대방에게 어떤 생각이 들게 할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특히 요즘 이런 생각을 자주 하는 나날이다. 예전에는 타인에게 내 생각을 전달하기에 바빴다. 그게 소통이라고 생각했고 그게 더 중요했다. 지금은 아까 말한 것처럼 말할 때 자주 멈춘다. 아니, 시작하기 전에 생각해 본다.
2023.03.14.01:39.연기에 가하는 목적 없는 채찍질. 근 며칠간 정말 많은 영상을 찍었다. 오디션 영상이기도 하고 촬영 영상이기도 했다. 첫 영상 까지는 마음이 괜찮았다. 그런데 오늘 연기를 보니 엉망이다. 하나씩 촬영하면서 나는 뭔가가 잘못 됐음을 직감했다. 준비도 부족했고 연기에서 어떤 것도 빛나지 않았다. 그저 조잡한 기술 몇 가지만 있을 뿐이었다. 타성에 젖어서 하던 대로 하는 연기. 장면과 인물에 대한 통찰력도 독창성도 없었다. 그래서 마음이 괴로웠다. 보통 같으면 문제를 짚어 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냥 채찍질
살인자와 프로파일러는 앤 울버트 버지스가 쓰고 김승진 님이 번역하고 북하우스에서 2023년 2월 24일 초판이 나왔다. 가장 최근에 나온 범죄 프로파일링 기법 책이다.저자는 1936년생으로 보스턴칼리지 간호대학원 교수며 법과학, 정신 의학 전문 간호사로 20년 넘게 FBI와 일했다.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에게 낙인찍는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는데 앞장섰다.책이 두께에 비해 어렵지 않게 읽힌다. 자기 얘기를 덧붙이며 쉽게 친숙하게 썼으며 사례를 들어 지루하지 않다. 사례가 너무 자세해서 놀랍지만 생생하게 범죄에 대해 접근할 수 있다. 범
갈필, 못다 쓴 편지 / 김주선 이보게 용식이.한문 서체보다 한글이 서툴렀음에도 아버지는 매번 이름만 반복해서 써보고는 종이를 접곤 했다. 글씨 연습하는지 붓의 결을 테스트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모필에 먹물을 흥건하게 묻혀 쓰는 매끈한 글씨체도 아니고 뻣뻣한 갈필로 쓰는 비뚤비뚤한 글씨였다. 게다가 먹물도 잘 먹지 않는 붓인지라 글씨의 획은 각질이 생긴 발뒤꿈치처럼 트고 거칠었다.삼십여 년 전 엄마의 거울처럼 맑은 달이 뜬 밤이었다. 제삿날에 지방紙榜을 쓰는 정갈한 자세로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먹을 갈았다. 지금으로 치면 캘리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