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를 만나기 전에 복권에 당첨된 환상을 가진 40대 동영상 제작자가 당첨 이후의 자신의 행적에 대해 꾸는 꿈은 아무리 길고 아무리 자세해도 질리지가 않았다. 아니 자세할수록 길수록 사내는 구체적인 행복감을 맛보며 그 황홀한 도취 속에서 깨어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주머니에 돈을 잔뜩 챙긴 그가 머리에 떠오르는 순서대로 전화를 해보자 미나라는 아이가 받았고 이 신인 여배우의 도착을 기다리며 잠시 전시장에서 그림 감상을 하고 있었는 바, 배우의 도착이 가까워지면서 더 이상 여기서 눈 아프게 그림을 들여다봐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물
까치 택배 윤 한 로빨강 얼굴 빨강 코웬 사내헐럭하니 망사조끼엔 ‘까치 택배’ 새겼다(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 온다는 게로군)근사하다오늘도 반지하 우리게 저벅저벅 걸어들어완박스 하나 휙 뿌리고 간다빨강 팔뚝 빨강 다리 대낮부터 삭힌 홍어 냄새 풍기며어드메 먼 친척이나 되드키시작 메모장마철 반지하 사무실은 훅훅 찐다. 노트북 잡무 속에 머리를 붙들고 앉아있자니 짜증스럽다. 언제부터 택배가 너무 많이 온다. 하루에 십여 차례도 더 온다. 쓸데없는 책자니 유인물이 거지반이지만. 거칠게 들이닥치는 붉은 얼굴 택배 사내들, 이따금 그 모습이
부자의 심정을 알아가며 복권에 당첨된 꿈을 꾼 40대의 동영상 제작자가 당첨된 이후의 자신의 행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떠올리고 있는 바 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아침부터 구두를 닦고 아점으로 양평 해장국을 먹고 편의점에 가 복권 두 장을 구입하고 슬슬 거닐다 업계 사람 하나를 만나 자금사정이 절박한 그와는 달리 한가한 마음으로 그의 지루한 이야기를 들은 다음 찻값을 내주고 헤어져 이제는 저녁을 함께 할 사람을 구하는 바 상대는 남자나 여자나 여대생이나 상관없다고 하였다. 그렇게 해서 복권에 당첨된 남자는 요 근래 머리에 잔상이 지워
벤치 윤 한 로아 아 문리대니 예대니 계집애들은왜 그렇게 깔깔거리는지스모르에 백구두에꾀죄죄, 시 나부랭이 좀 써보겠다고대학물 한번 먹겠다고 나 같은 놈팽이연천에서 올라와 나무 벤치 위외롭고도 마냥 쪽팔리더라청자 한 대 꿀리곤 신문지 한 장 뒤집어썼지스물둘 초여름파란 하늘에 흰 구름 한 덩어리천천히 천천히 흘러가도록시작 메모문학을 하겠다고 대학물 좀 먹겠다고 삼수하고 연천에서 올라왔는데, 스물두 살 내가 타던 84번은 지금도 아프게 한다. 대지 극장을 지나 미아리를 거쳐 창경원을 스쳐 화신 앞을 흘러 서울역을 나와 용산을 넘어 한강
복권에 당첨되는 사람은 소수다. 6등짜리야 수도 없이 많지만 십만 원대는 드물고 백만 원대는 가뭄에 콩 나듯 하며 2등이라 일컫는 천만 원대는 감히 꿈꾸기 힘들며 적게는 수억에서 많게는 수십억에 이르는 소위 1등 당첨은 과연 이승에서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드는 대박 행운인 것이다. 그런데 당첨을 꿈꾸는 건 손쉬운 일이어서, 특히 복권 한 장을 사둔 상태에서는 그 꿈은 대단히 구체적인 양감을 가지고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지게 된다. 40대의 동영상 제작자는 복권 당첨에 대한 꿈뿐 아니라 당첨금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매우 구체적으로 떠
새벽 미사 윤 한 로두 손 겹쳐 성체를 받아 모신다마냥 지지고 볶고 저들 위해 나 또한 옷이 되리니 굶을라 밥이 되리니갑자기 뒤설렌다그렇고 그런, 시시껄렁한 이놈한테서도자칫 춤과 노래 흘러나올 것 같아휘휘 보따리니 전대 돈이니 다 놓고부르튼 손발 오늘 하루지팡이 하나만으로 가본다 시작 메모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걸핏하면 발가벗고 춤을 췄다. 짐승들과 얘기하고 노래했다. 이스라엘 다윗왕은 싸움에서 이기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고 춤을 췄다. 진정한 시인이며 목동이다. 아주 어린 애일 때 우리들 또한 아버지 어머니 앞에서 마냥
이스라치 윤 한 로더두 덜도 아닌꼭 어제만큼 떨어졌네양재기에 한 홉큼 빨간 알갱이들꼭두새벽 이슬 머금어좀 시금털털하쟤아버지 오입 가 돌아오지 않는 된 밤, 파랗게 걷히고* 이스라치 : 산앵두나무 열매. 시작 메모붉은 버찌 알알이 깔린 아스팔트 언덕길을 오른다. 빗자루에 쓸리고 애들 발에 그렇게 짓밟히고 차바퀴에 으스러졌을 텐데 또 다시 어제만큼 깔렸다. 언제나 출근길은 화가 나지만 이것들로 참을 수 있다. 이 도시에서 이슬맺힌 버찌 언덕길은 내 마음에 ‘이스라치 깔린 산길’이다. 백석 시를 읽고 거기서 처음으로 이스라치라는 아름다운
복권 당첨금 받으러 가는 길에 웃으면서 산 복권이 우리는 복권에 당첨된, 말하자면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가정하고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는 40대의 동영상 제작자가 즐겨 상상하는 한 대목을 보고 있다. 그는 주머니에 5만원 권 60장과 만 원 권 100장 그리고 분실 위험 때문에 일일 한도를 5백만 원으로 설정해놓은 체크카드를 넣고 길거리에서 구두를 닦은 다음 전문 음식점을 향해 아침겸 점심을 하러 걸어가고 있었다. 소위 여자들이 말하는 `브런치`라는 건데 그녀들은 그것을 장소와 밀접하게 엮어 예쁘고 세련되고 원두커피가 따라 나오는 그
기말 고사 윤 한 로우리 재수할라요웬만한 애들 거의 엎드리고수학 시험 시간수학 시험 문제지에모자도 그리고우스꽝스럽게 권총도 그리고시내 삐끼 다리도 그리고조용조용히 어느 소녀 얼굴과다시 그 얼굴 코 밑에 찍찍 숯검정 수염도 칠하고속절없이 먼 산 바라다간 어느새 손가락 깨물며, 물어뜯으며깨알같이 쓰는 시란정말 맛있습죠만우리 곧 구겨버릴라요시작 메모조선시대 문장가 이옥이 쓴 글 중에 저잣거리 모습을 쓴 게 있다. 소, 닭, 청어 끌고 엮고 오는 사람들에 입은 옷, 옷자락, 신발 같은 누추한 행색이 고작인데, 아아. 이옥은 이것들을 퀘퀘하
돈을 어디에 쓸까 복권에 당첨된 돈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는 건 행복한 고민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게 실제로 쓰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한 과정 없이 그저 눈에 띄는 대로 돈을 펑펑 써댄다면 감성이라곤 없는 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자는 파트너와 잠자리에 들 때도 다정하거나 세심한 전희 없이 무작정 돌직구를 날리는 형으로 성급하게 본론만 치르고 나가떨어지기 십상이다. 후희는 없냐고? 전희가 없는데 후희는 무슨 말라비틀어질 후희이겠나. 해서 우리의 동영상 제작자는 그러한 모든 과정을 상상하는 걸로
돈을 어디에 쓸까 생각해보자 평생 복권이라곤 사보지 않은 고대해양, 그녀는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 복권 사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고는 싶은데 자꾸 잊어버려서인가? 아니면 복권은 사는 게 아니다, 열심히 내 팔 흔들어서 살아야지 같은 진취적이고 바른 생각을 하기 때문일까. 정확하게는 위 셋 모두 답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고대해는 복권을 산다는 생각 자체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뇌구조를 갖고 있었다. 복권 사는 사람을 멀뚱히 볼지언정 복권 사는 걸 말리거나 왜 사냐는 등 가시 돋친 발언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복권과 상관
민들레 윤 한 로가냥 두었더니 골대 뒤쪽까지죄 짓쳐왔네시퍼런 잎 곤두세우곤 이것들이,내 어렸을 적 촌충처럼 샛노래라애기똥풀꽃엉거주춤두 손가락 가만집어보네시작 메모날이 더워지기 시작한다. 갑갑해서 한두 번 야외 수업을 한다. 민들레들이 야산 언덕바지서 강당 옆댕이로, 운동장 축구 골대 골키퍼 자리까지 욱대기며 피어났다. 시퍼런 창 같은, 톱 같은, 칼 같은 이파리들 치마처럼 두르고, 샛노랑 꽃 한 송이씩 쑥, 찌그린 게 앳되다. 나한테 샛노랑은 다 촌충 빛깔이다. 어렸을 적 촌충을 가진 나는 얼마나 아프고 조용했던가. 이 민들레를 자
신분이 바뀌었다 해서 대기업 상무였다가 재산을 모두 날리고 대리기사가 되어 묵묵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사내는 한 주에 연금복권 두 장을 사서 소중히 안주머니에 모셔둔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한 바 있다. 그 자리에서 긁어대는 즉석복권의 가벼움에 대해 그는 비교적 회의적이었다. 복권은 기다리는 맛이 있어야 참다운 맛을 느낀다고 평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또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100원짜리 동전을 세워 긁어대며 숫자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면 그다지 멋져보이지 않을 터였다 .그리고 긁어 부스럼이라고 부스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