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 숙인 사람들- 마혜경 핸드폰에 빠진 사람들 고개를 숙이고 있다 좋아요 하지만 슬퍼요 아까 그건 기뻐요 흔들리는 지하철에서도 꼭 붙잡고 있는 건 아버지의 손, 아내의 어깨 그렇다고 연인의 팔짱도 아니다 게임은 무기가 많아 페이스북은 이름을 묻지 않지 누구든 인사할 수 있는 인스타야말로 안녕해 좋은 게 좋은 거라면서 그래야 세상이 더 좋아지는 거라면서 고개를 숙인 사람들뿐이다 서로를 모르지만 고개를 숙이는 동안은 이웃일지 모른다 그러나 얼굴을 모르기 때문에 거짓말이 자랑스러운 그래서 고개를 조금 더 숙일 수밖에 없는 구부정한 사람
사랑이 고프다- 마혜경 눈꺼풀 위로 어둠이 내려앉는다거꾸로 걸어간 발자국은어제의 안녕만 이야기하고 난, 너의 눈빛이 가슴에 송송 박혀흰밥으로 무덤을 쌓는다묘비명을 고민하다가문득 밥그릇을 보니 니가 너무 고프다
딱, 거기까지- 마혜경 그날 그는 술이 떡이 되었다그의 기억은 천안에서 택시를 타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까지다기사는 그의 어머니가 불러준 주소를 찍고 안양으로 달렸다그는 오바이트를 했고 한 시간 가량 개소리로 울었다요즘 카드 안되는 택시도 있나요푸들을 안고 나온 그의 어머니가 빳빳하게 서있다에잇, 그럼 애초에 안 왔지세차비 이만 원을 간신히 현금으로 챙기고택시가 몇 개의 어둠을 끌고 떠나자남은 어둠이 그 자리를 메웠다개가 어둠을 향해 짖었다 다음 날에도 그의 기억은,천안에서 택시를 타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까지다 딱, 거기까지다
다 보여요, 당신의 에티켓- 마혜경 코로나19로 일상이 제한된 지 일 년이 넘었다. 우리 삶을 지배하는 큰 그림이 있었다면 그 그림을 다시 스케치하는 시간이 오래 지속되고 있다. 가장 먼저 손이 간 부분은 사회를 질서 있게 움직이던 몇 개의 제도다. 가령, 다수의 인원이 포함된 모임을 규제한다거나, '사회적 거리' 라는 슬로건에 맞게 개인 간의 철저한 위생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망각의 동물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쉽게 익숙해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마스크가 당연한 소지품이 되는가 하면, 손 소독제나 물티
호미- 마혜경 의왕시 초평동 열여섯에 시집온 김막녀는 열여덟 될 때까지 신랑하고 손만 잡았다 강산이 여덟 번 바뀌도록 소처럼 일했다 밟았다 하면 제 땅이었다 그러나 세 아들이 직업 없이 놀자 붉은 말뚝이 하나둘 꽂혔다 그날도 몰랐다 왕송저수지 앞 노른자 땅이 경매로 넘어간 것을 마을회관에서 곧 죽을 노인들과, 괌에 놀러갈 좀 더 젊은 노인들과 춤을 추었다 내가 도장을 안 찍었는데 무슨 땅이 넘어가 실눈 사이로 검은 눈동자 밤처럼 가득했다 글쎄, 둘째 아들이 찍었다 안 카나 야가 먼 말을 하나 덩실 추는 춤이 엇박자로 엇갈렸다 이거
여서 스님은 바리스타- 마혜경 여서 스님을 뵌 적이 있다아버지 천도제를 보현사에 모셨는데차가 막혀 도착하니 음식 보따리만 기다리고 있었다이를 어쩌나 면목이 없던 차에 차 한 잔하고 가시죠 손수 다기 세트를 꺼내어 물을 끓이신다차를 준비하는 시간이 조용히 흘러간다마음을 차분하게 가다듬고 주변을 돌아본다고요하고 잔잔한 바람이 스쳐간다탕,다기 부딪치는 청량한 소리 커피, 제가 커피를 좋아해요 속세에서 지각한 사람에게 이만한 위로가 또 있을까여서 스님의 커피향 여태 그립다
소설가를 질투하다- 마혜경 이제 난 장편 세 개만 쓰면 끝이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옆 골목 짬뽕이 왜 오백 원이나 내렸을까 다들 궁금하지 않나남편을 살해한 죄수의 딸은 누구의 팔을 베고 잠들까신문에 없는 얘기는 어디에 실릴까 이런 게 궁금한 거야삼인칭 소설은 언제쯤 쓸 수 있을까제길, 자연사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칠십이 넘게 살았는데도 알 수 없어 그가 소설가의 고민을 받아 적다가 멈춘다아, 차라리 소설을 쓸 걸시인보다 말 잘하는 소설가가 될 걸
양화대교를 건너는 법- 마혜경 양화대교를 지나고 있다건너편에 송전탑이 있다는 걸 그동안 몰랐다에펠탑이 아니라면 철골 구조 또는 흉물 안개가 녹슨 표정 몇 개를 지우고 있다작은 각도로 액셀을 밟는다 가까이 다가온다지워지지 않은 선들이 안개 뒤로 숨는다 창을 열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라디오에서 나온 바이올린 소리 멀리 달아난다네 가닥 검은 전선에 올라타 연주를 시작한다검은 새들이 수만 볼트의 전압을 물고 날아간다 어쿠스틱 카페 라스트 카니발* 강을 건너고 있다안개를 지우며 내가 한강을 건너고 있다 *라스트 카니발 - 일본 재즈 뮤지션 '
고립을 향유하다 벌써 작년이 되었다. 도심을 떠난 지도. 지난 연말 이곳 제주도에 내려올 때는 몇 가지 일을 처리하며 생각을 글로 옮기는 작업을 계획했었다. 시간은 약속대로 잘 흘러갔고 생각보다 일 처리도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조용한 제주도는 낯선 사람을 그대로 품었다. 그래서 코로나 분위기에 민폐가 되지 말자는 다짐을 하며 돌아다니는 일보다 고립과 고독을 고집했다. 자발적인 시도 덕분에 깊이 사유할 수 있었고 삶의 무게를 줄일 수 있었다. 제주의 날씨가 나흘 정도 쨍쨍했다면 나머지는 거의 눈이 내렸다. 발목이 푹푹 들어가던 눈이
부재중- 마혜경 벨이 울리자 엄마가 걸어온다밥 먹고 다녀라왜 안 오냐고 말하지만작은 목소리가 오다가 죽어다른 것을 끌고 왔는지도 모른다 아프다는 말이 오다가 아파서 죽고서럽다는 말이 서러워 죽어조심해라 걱정 마라를 끌고 왔는지도 모른다 보고 싶다는 말이 오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죽으면눈물보다 먼저 오는 말 나는 괜찮다 그래서 세상에는일방적인 모른 체와 하소연뿐인 통화가 있는 것이다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야 할 사람이 있는 것이다
아이스크림 주세요- 마혜경 기차에 오른다 중절모 쓴 남자가 오르고 다리를 끄는 할머니가, 엄마 옷자락을 잡은 아이가, 아가씨가 기차에 오른다 스티로폼 박스를 맨 여자가 마지막으로 올랐다 사람들이 표를 들고 있다 뚱뚱한 여자는 표가 없다 오선지 목주름엔 물방울이 맺혔고 박스엔 누런 테이프가 감겼다 왜 표가 없을까 가슴과 어깨에 모서리가 없어서 일까 그럼 그녀는 뭐가 있을까 헤이, 손을 든 남자,헬로, 지폐 흔드는 아가씨 모서리 없는 그녀가 걸어간다아이의 콧등 아가씨의 인중과 남자의 입술을 향해표 대신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들고 이 달러
유치원 가는 어른- 마혜경 방금 내린 커피를 후우 불어본다유리창이 손바닥만 한 입김을풍선처럼 불었다가 삼킨다창밖에 유치원 가는 어른어깨보다 작은 가방을 메고울고 있는 더 작은 손목을 잡고두 개의 까만 머리가 걷고 있다 햇살이 유리창을 지나간다유치원 간 어른이 돌아온다어깨와 손을 그곳에 비우고차박차박 걸어오고 있다 이때 세상이 해야 할 일은그들을 바쁘게 괴롭힐 것서로가 그립지 않게 까맣게 잊을 수 있게잠시 못되게 굴 것
양화대교를 건너는 법- 마혜경 양화대교를 지나고 있다건너편에 송전탑이 있다는 걸 그동안 몰랐다에펠탑이 아니라면 철골 구조 또는 흉물 안개가 녹슨 표정 몇 개를 지우고 있다작은 각도로 엑셀을 밟는다 가까이 다가온다지워지지 않은 선들이 안개 뒤로 숨는다 창을 열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라디오에서 나온 바이올린 소리 멀리 달아난다네 가닥 검은 전선에 올라타 연주를 시작한다검은 새들이 수만 볼트의 전압을 물고 날아간다 어쿠스틱 카페, 라스트 카니발 강을 건너고 있다안개를 지우며 내가 한강을 건너고 있다 *라스트 카니발 : 일본 재즈 뮤지션
서울에 잘 있습니다- 마혜경 버스가 톨게이트를 지날 때마다철렁, 심장 깨지는 소리가 났다옷장 속에서 엄니 돈을 훔친 그는이번에도 안 되면 용산에서 죽을 것이다 서울은 반듯해서 한눈팔면 부러진다는데조금 부러진 사람들을 따라간다 서울 가면 코 베어 간다는 말, 몰라서 하는 소리 그곳에선 주문도 받지 않고 밥을 내온다 가정식 백반집이라고 한다 그는 십삼 년째 밥을 배달하고 있다공짜 밥 한 그릇에 제육볶음, 국수 값이 올라도몇 년째 월급을 올리지 않았다그는 부러지지 않고 밥을 잘 먹고 있다그러니까 용산에서 잘 살고 있다
미안해요, 잠시 웃을게요- 마혜경 모르겠다 그런 이야기는 어떤 이유를 달고 오는지깃을 세우시고 젠틀하게 걸으시던 분부동산 중개소에서 광을 팔다 숨이 멈췄다이영호 씨는 꺼어억, 죽었다고 한다친구들은, 니들도 머지않았다는 이영호를 보고 어 어, 계산은 확실히 하고 가야지 태어날 땐 미리 날이라도 받지이 얼마나 순간의 일인가 세상에서 가장 웃픈 플롯
관계자 외 출입금지- 마혜경 롯데호텔 뷔페 안에서 창밖을 보니제주도 바다가 동그랗게 날 감싸고 있다물항아리 속에 들어앉아 고개만 내민 난 독 안의 쥐 바깥은 낭떠러지가 분명해물 싫어하는 고양이가 언제나 많지세상을 할퀴며 기어 올라오고 있어난 간당간당 머리만 내놓고 그 발톱 끝에 침을 뱉지 겁이 나서 발뒤꿈치만 들지
아직도 어른이 되는 중이죠- 마혜경 주머니에 시간을 넣는다구멍으로 모래가 떨어지고 쌓여서 시간이 된다떨어진 시간은 모래가 된다모래는 뒤집으면 시간이 되지마시간은 뒤집을 수 없고주머니에 꽂은 두 손은 떨어지지 않은 채아이는 무사히 어른이 된다어른이 된 아이는 어른이 아닐 때가 많다침을 뱉고 어른 흉내를 내지만아주 가끔 어른일 뿐이다사람들이 모래처럼 떨어질 때누군가는 시침으로 나침반을 만들고아이는 꿈을 꾼다떨어질 때마다 키가 크는 아이는 어른이 되어도 아무것도 아닐 때가 많다모래도 시간도 구멍으로 떨어지지만구멍은 떨어지지 않고주머니의
난 핑계를 찾고 있다- 마혜경 밤에게 물었다 어디서 어둠이 물든 거냐고 무엇을 쏟았길래 얼룩이 생겼냐고 별을 표백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태양이 빛나면 발밑에 숨어버리는 그림자도 골목을 걷는 사람들 등에도 어둠이 묻어 있었다 유독 별을 통과한 밤만 깨끗했다 농담을 좋아하나요 밤이 내게 물었다 조금, 사실 혐오하는 편입니다만 그날 누군가를 스쳤는데 그때 으스러졌다며 그의 어깨가 물든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조각 몇 개가 떨어져 구멍이 났는데 빛이 그 사이로 빠졌다며 사람들이 그것을 별이라 부른다 했다나에게 물었다 아니 밤이 나에게
두통-마혜경 물고기를 내려다본다머리가 잘린 채 살아있는 물고기머리를 잘라도 죽지 않는 내가짧아진 머리카락을 만지며파닥이는 지느러미를 내려다본다단발머리가 흔들리고 지느러미가 떨리고머리가 잘린 머리는 죽어간다 잘린 머리카락이 나를 찾는다머리가 잘린 물고기는 날 올려다본다물고기 머리에 머리카락이 자라나고그 머리카락이 나를 찾는다 어떤 머리는 죽고머리를 잘라도 죽지 않는 어떤 머리는 자라난다
거미줄- 마혜경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소설 읽다 잠들어 새벽에 발견한 밑줄처럼간결하고 촘촘하지만 바람이 지나다니는 집 껍데기를 매달아 죽음을 볕에 태우는파티 말고 애도가 한창 진행 중인 곳거꾸로 매달려도 떨어지지 않는 그 집은욕심이 하루만큼이라서어떤 글을 써도 아침이면 빈칸으로 인쇄된다 이슬 속에 태양이 맺혀 문패가 필요 없고거울은 더더욱 쓸모없는주소가 아카시아 줄기와 콘크리트 벽 사이쯤으로 전해지는 이런 집이라면 빈 몸으로 매달려 흔들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