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푸레 촛불 그해 겨울딱 한 번광화문에 올라갔다진눈깨비 오는 날 대부님나그리고 미카엘라이렇게 셋 우리 작게아주 작게들었다보탰다 시작 메모성체를 모신다. 작은 밀떡 쪼가리지만, 아무 맛도 없지만, 지극히 단순하지만 영혼에 기쁨을 주고 힘을 준다. 성체를 받아 모시고 가난을 청한다. 내 비록 내 돈 벌어 내가 쓴다지만 맛난 음식 먹는 것도 죄요, 멋진 옷 입는 것도 바로 죄요, 귀에 좋은 노래, 달게 자는 잠 또한 죄가 되려니와. 한가할 ‘한’, 늙을 ‘로’, 한가하게 늙는다는 이 이름 석자야말로 더더욱 죄스럽구나. 아직 늦지 않았으니
축 사망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겸손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오늘의 부고엔 절대 겸손해지지 않으련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가을의 막바지에 다까끼 마사오는 죽었고 그 죽음에도 겸손하지 않았다.눈이 내리던 그해 12월 어느 날 교문에는 장갑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잔인한 4월이 잔인하게 지났고 계절의 여왕이라는 달에 광주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하였다.M16 총부리엔 대검이 꽂혔고 그 날카로움은 열정의 청년 복부를 찔렀다. 오늘 그놈이 죽었다.사형 언도에 무기징역 죗값을 치루던 놈을 대국민 화합이라는 미명하에 사면이라는...국민은 분
희망 고문 붙잡고 삶을 지탱하는 사이계절은 바뀌어 단풍들고 낙엽진다희망 고문의 시간 계절이 바뀌는 동안에도시냇물은 말없이 흐르고냇가에 심겨진 은행나무계절의 변화에 노랗게 물든다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 노랗다힘들어 지친 세상도 온통 노랗다노랗게 지친 사람 사이의 끈은 끊어진 것일까적막한 시간에도 물은 지칠줄 모르고노랗게 물든 은행잎 한 잎 두 잎 물 위에 떨어진다물은 은행잎을 품고 은행잎은 물을 붙잡고바다를 향해 간다끊어진 줄 알았던 사람 사이의 끈자세히 보니 끊어지지 않았구나이어져 있구나단단하구나
김장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텃밭에 배추와 무수를 심으셨다.일곱 식구 겨우살이 양식을 준비하신 것이다.해마다 이맘때쯤 배추를 뽑으신다.배추 뿌링이는 우리들 몫이다.흙 묻은 뿌링이는 칼로 덕덕 긁는다.뿌링이 맛이 오묘하다.고소하고, 매콤하고, 달콤하기까지... 엄마는 속이 꽉 찬 배추를 준비한다.떡잎을 다듬고는 칼로 쫘악 가르신다.큰 포기는 네 쪽, 작은놈은 반굵은 소금 푼 물에 절구고하룻밤 재운 후 깨끗이 헹군다.갖은양념 버무린 속은 참 맛있다. 어우리 온 아주머니들과 김장이 시작된다.아버지는 돼지고기 앞다릿살을실로 꽁꽁 동여매고된장
반려견 구름이와 걷는 산길부끄러웠던 어제가 일어서고술 덜 깬 부시시한 얼굴에소나무 사이를 헤집고 온 바람이 멎는다고개들어 바라보는 하늘가흰구름 타고 흘러가는 반란의 꿈총소리와 포연없는 코로나19와의 전쟁언제 끝나려나 이 놈의 전쟁방역대책 때문에 경마가 멈춰 매출도 멈췄는데지원 업종에 해당되지 않아 손실보상금조차 받지 못하는 처지눈덩이처럼 커지는 근심과 걱정 위로시시각각 고리의 대출이 공격한다가슴 옥죄이는 쪼들림에 숨이 멎는다자본의 힘이 가난을 짓누를 때시선 둘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산책로 위로회오리 바람 인다그래
두 번째 눈 어쩜 저리 얌전히 오실까?그리도 머언 먼 하늘에서그리도 먼 길을 내려오는데지친 기색일랑은 아예 없고소리 없이 조용히 오실까? 오신 눈은 소리 없이 녹는다.소리 없이 녹는 눈은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누군가에게는 눈물이다. 더러는 소복소복 싸인다.싸이는 눈은 순백의 아름다움으로 대지를 덮는다.인간이 저지레를 떤 자리를하얗게 감싸준다. 누군가의 눈물을위로로 감싸주는 따뜻함은순백의 눈보다 아름답다.
첫눈 사랑하는 마음들이 반짝이다가하늘로 올라별들이 된단다. 별들이 서로 사랑을 하다가아랫녁이 그리워첫눈으로 내린단다. 첫눈이 내리는 날에정동길 안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40여 년 전 혜숙일랑은 잘 있으려나? 첫눈은때로는 반가움으로 내리고때로는 그리움으로 내린단다.첫눈에 반한 첫눈처럼네게 첫눈에 반하고 싶다.
콤포스텔라 2 아아나 같은 새끼도거기갔다 왔네 시작 메모내가 나를 진정 무참히 짓밟을 때 찌그러뜨릴 때 나는 얼마나 깨끗한가 맑은가. 나는 이제야 시다운 시를 가지게 됐습니다. 나는 내 시 중에서 이 시가 가장 자랑스럽습니다. 신춘문예 당선작 보다도, 다른 사람들 어떤 시보다도 자랑스럽습니다. 내게서 이런 시는 앞으로 또 나오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나는 내 시집 전부보다 이 시 한 편을 사랑합니다. 기뻐합니다. 자주 이 시를 떠올리며 짧지만 아주 오래오래 읽습니다. 아아, 나 같은 새끼도 이런 시를 썼습니다.
산다는 건 길을 걷는 것입니다.그 길은 물리적인 길과 마음의 길이 있지요.마음길을 걷는 것은 연습이 필요합니다.성찰하고 되돌아보고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길은 둘이 걷기도 하고 홀로 걷기도 합니다.혼자 걷는 길도 외롭지만 둘이 걷는 길도 외롭습니다.둘이 함께할 때의 외로움은 훨씬 크게 다가옵니다.걷다가 갈림길을 만나면 선택이 필요합니다. 아픔을 이겨 내는 것입니다.수없는 아픔을 만나고수없는 상처가 남기도 합니다.그 많은 아픔과 상처를 마주하며 이겨 내고 치료하며 살아갑니다.아픔에 가위눌릴 때면 삶이 끝나는 것입니다. 꿈을 꾸는 것입
콤포스텔라 1 우리는 얼마나 부유한가얼마나 가난하지 못한가먼 들판에 별, 콤포스텔라부르트고 깨지며 걷습니다노란 화살표 달고조개껍데기 달고얼굴엔 애법, 먼지 수염 덥수룩눈 뜨면 걷고밥 먹으면 갑니다바위틈바구니 으슥한 잡목 구렁오줌똥 누고 나서또 걷습니다 지긋지긋하게사람들이 싫어지고온통 말이 싫어지고네깟놈이뭐냐 네깟놈이뭐냐마음속 숱한 헐뜯음솟구치던 미움들조차 하나하나 역겨워집니다왜 이렇게 걸어야 하나 꼭 이렇게 가야만 하나조용히 국으로다 찌그러져 있는 건데마침내 떨거지가 되어너덜너덜 저절로 갈 때빛나는 황토 발 두 짝들판 별이 됩니다
로세티 번역을 한 적 있지만 영시 강의듣는 중 선생님이 소개한 좋은 시가 있어 번역해보았다. 젊은 세대에 맞춰 대화체 느낌을 두었고 현대시는 마침표를 안 하니 생략했다. AMENIt is over. What is over? Nay, now much is over truly:Harvest days we toiled to sow for; Now the sheaves are gathered newly, Now the wheat is garnered duly.It is finished. What is finished? Much is fin
깊어 가다 청춘을 자랑하던 나무도계절을 피할 수 없나 봅니다. 알록달록 오색 단풍이산마루에서, 골짜기에서앞을 다투며 깊어 갑니다. 낮았던 여름 하늘도 덩달아위로 더 위로 치달려투명한 옥빛으로 가을을 이야기 합니다. 깊어 간다는 것은 커다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어 가고너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 가고 마음이 깊어 가면 지극해 집니다.한 번 떠올릴 것도 두세 번 떠올리고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꽃도정성스레 한 번 더 보게 됩니다. 깊어 가는 가을 시간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좋겠습니다.그래야 내가 내게 조금 더 깊어
모세야, 우리 열공해서 인서울하자 네가 꼬부리고 잠든 새벽 정태놈한테 온 쪽지더라그런데 왠지 뭉클하다관양노을실바람소리(우리 아들 아이디 한번 멋지네) 모세야고3 올라온 지도 벌써 두 달이 다 지나갔구나애기 같은 얼굴로 중학교 들어간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젠 길쭉하니 마빡에도 여드름 숭숭, 아름답게 잘 컸구나세월 참 빠르다 착하디착한 모세야어젯밤 네게 손댄 것용서해 다오 정말 가슴 아프다신부님되기싫어요실용음악과갈래요아빠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그렇게 순종하던 녀석이어려서부터 성인 사제가 되겠다고십 년도 넘게 미사하며 기도하던착
아버지 학교 막살았구나 입때껏눈물 콧물도 모르고 헛살았구나용접하고 치킨 튀기고물건 떼 오고 배달하고땀 뻘뻘 흘리며 일만 알 뿐기계처럼 돈이나 벌 뿐 그대들애들 너무 싫어해요요즘은 그러시면 안 됩니다안아 주고 키스하고발 닦아 주고 데이트하고요리도 하고 세탁기도 돌리고아침마다 허그를 감동을 창출하세요부드러운 말에 표정에우리 몸 던져야 합니다웃는 법 우는 법 연습에날마다 고마워요 열 번씩 하기숙제 꼭 하서요 노력하세요여보미안해요 아들아딸아사랑한다 틈만 나면 문자는 꼭 주시겠고뭉툭한 손가락 떨쳐떠듬떠듬 보내세요 배우세요그저 시큰둥 눈 깜빡
제주도 미혼모- 마 혜 경 제주도 아침을 지나간다. 길이 기지개를 펴고 있다. 산방산 11킬로미터 양쪽으로 다리 벌린 도로에 천천히 들어간다. 안개를 묻히며 오르막을 지난다. "전방에 방지턱이 있습니다" 내리막을 지나서야 안개를 털어낸다. 7킬로미터, 거친 산통 야자수 뒤로 숨는다. 정수리가 고개를 들자 아기 울음 길 위에 퍼진다. "3킬로미터 남았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검푸른 청년으로 자라고 있다. 둥근 그림자가 길 위에 서 있다. 500미터, 혹시 골리앗! 아, 근사한 다윗은 아닐까...사람들이 줄지어 섰다. 보문사 불상도
유혹에 빠지기 살 뺀다고 마음먹은 다음 날맛있는 음식을 멀리 하기란쉽지 않은 일 맛있는 음식과 곁들이는미주를 참는 일은더더욱 쉽지 않은 일 잔잔히 밀려오는 파도처럼오후 두 시에 찾아오는 졸음을이겨내기도 어려운 일 아름다운 여인의 추파와고혹적인 입술을 멀리하기란죽기보다 어려운 일 마음 가는 대로 그냥유혹에 빠지게 하옵소서.
뜨거웠던 여름 서늘히 식어가고병걸려 죽거나 굶어 죽거나 잔혹한 시간을 강요하는 코로나19이제는 함께 살아가야 하는 바이러스반려견 '구름'이와 함께 걷는 산길산모퉁이 돌 때마다 한움큼의 추억이 떨어지고또 한 해의 가을이 깊어가네적폐청산 평화 번영 통일 촛불의 꿈은 아득해지고생존을 요구하는 피켓들이 아우성치는구나콩 한쪽이라도 서로 배려하며 나눠먹으면 좋으련만누구는 죽이고 누구는 살리는 선택적 권력이 난무하고물어뜯고 할퀴고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이 인기를 모으며낙엽처럼 돈이 마구 뒹구는 세상울긋불긋 단풍같은 자본주의가 춤추는데생을
오, 영세 언제 적 제자였나온순하고보일 듯 말 듯 다리를 조금 절었지지금은 한쪽에서늘 그릇 닦는 마음으로시를 쓰고시 쓰는 마음으로그릇을 닦는다니그러나 시는 썩 좋질 않기, 오히려그 마음 얼마나 아름다운가끌리는가 떵떵거리는잘난 이들 잘 쓴 글보다도―웃기는 짜장면들,영세가 빨리 좋은 여자 만나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으면아들 하나 낳아꿈에도 그린다는 아버지가 되었으면이따금 영세를 통해 시를 다시 보고곰곰 내 인생 또한 생각해 볼 수 있어참 좋다―영세는 세 살 때 교통사고로 뇌수술을 받아 장애를 안고 살고 있다 그런데 잘 쓰지는 못하지만
딱지치기 딱지를 '딱'하고 치니까'딱' 하는 소리가 난다.그래서 딱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