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날 살레리를 거쳐 파부루까지 강행군했으나 파부루에 도착했을 땐 항공사 사무실 직원이 문을 잠그고 퇴근해 버린 후였다. 항공사 사무실 이층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에 여장을 풀고 주인에게 비행기 편을 물어보니 다음날 아침에 카트만두로 가는 비행기가 있기는 있는데 좌석이 있을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3월 2일 금요일 새벽은 몹시 추웠다. 전날 오후부터 뿌리기 시작한 비가 새벽에 그치더니 찬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설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침낭 속에 있는데도 무릎이 시렸다. 롯지 1층의 국내선 여객기 사무실은 날이 밝자마자 문을
시계의 중심에 피케를 놓고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걷기 시작한 첫날은 9시 방향에서 피케를 봤다. 그 고개의 지명은 데우라리였다. 거기서 6시 방향으로 내려와 빠쁘레에서 이틀을 묵었고, 다음날인 2월 28일에는 5시 방향의 자프레 바스에 도착했다. 위 사진은 자프레바스에서 바라본 피케의 모습이다. 피케의 남동쪽 비탈에는 눈이 많이 쌓여 있었다. 똘루 곰파에서 겪어 봤듯이, 밑에서 보기에는 희끗희끗한 눈도 막상 현지에 가 보면 무릎 이상 빠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피케의 북쪽 기슭인 람주라라(12시 방향)에서 피케에 오른다는 것은 불가
낮에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막걸리를 얻어먹었는데, 저녁이 되자 동네 사람들이 술과 안주를 장만하여 숙소로 찾아 왔다. 이미 반 말 정도를 마시고 얼큰하여 돌아온지라 더 이상 마시면 크게 취할 줄 뻔히 알면서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 잔은 받고, 누구 잔은 안 받겠는가. 조금만 달라고 부탁해 보았지만 그게 통하지 않았다. 주전자를 들고 서서 내가 잔을 비우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잔은 차야 맛, 임은 품어야 맛이라는 술꾼들의 풍류는 셰르파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대취하였는데, 웬 부인이 소주
총누리 어머니가 밥을 먹고 가라고 붙들었으나 막걸리만으로도 이미 배가 불러서 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마을을 둘러볼 겸 학교를 향해서 비탈을 올랐다. 그 비탈의 대나무 숲에서는 늙수그레한 사내가 딸들과 더불어 대나무를 잘라 다듬고 있었다. 학교가 있는 언덕 위의 마을 이름은 체르마딩이었다. 행정 구역으로는 파트레 3동이라고 했다. 8학년까지 있는 학교다. 앙 도로지 씨가 다닐 때만 해도 4학년까지 밖에 없었다. 그래서 앙 도로지 씨는 킹쿠르딩 곰파에 승려로 들어가 불교 공부를 했다. 총누리 형제가 다닐 때는 이미 8학년까지
앙 도로지의 옛집 2층 법당에서 잠이 들었다. 새벽 잠결에 소변을 보려고 일어나다가 천장에 매달린 큰북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간밤에 집주인 앙 까미와 동네 친구들이 가져온 소주와 막걸리를 많이 마신 탓에 머리를 부딪치고서야 내가 잔 방이 법당인 줄 알았다. 어떻게 그 방에 와서 자게 됐는지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무척 많이 마셨나 보았다. 소변을 보고 올라와 보니 앙 까미의 어린 아들이 엄마를 찾으며 울었다. 세 아이가 솜이불을 말고 함께 자고 있었는데, 페마는 아이가 우는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아이들 아버지 앙
깔로찌아와 짬바(보리 미숫가루)를 얻어먹은 후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앙 도로지가 작성해 준 일정표에는 전날 저녁에 킹쿠르딩 곰파에서 묵고, 이날 아침 동트기 전에 능선에 올라 일출을 본 후 곰파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하고 출발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전날 비가 오는 바람에 일정이 바뀌어 아침에야 곰파에 들러 차만 마시고 나왔다. 곰파 부근은 지름이 1미터가 넘을 침엽수들과 랄리구라스(네팔 國花)가 어우러진 울창한 숲이었다. 랄리구라스가 눈 속에서 꽃망울을 맺고 있는 숲 속 오솔길을 걸어서 덴바단다 능선에 오르니 높다란
마룻장을 울리는 힘찬 맷돌 소리에 잠 깨어 눈을 떠보니 아직 여명이었다. 건너편 침상의 쿨리들과 내 옆 침상의 총누리는 아직 잠에 취해있었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쌀 씻는 소리에 잠이 깼던 때가 엊그제처럼 떠올랐다. 소변이 마려웠지만 침낭에서 빠져나오기 싫어서 다시 눈을 감았다. 맷돌 소리는 여전히 힘차게 들렸다. 규칙적인 호흡과 일정한 박자를 정확하게 따르고 있는 것으로 봐서 멧돌을 돌리는 사람은 부인이다. 부인은 불교의 진언을 마음속으로 뇌이며 맷돌을 돌리는 듯 했다. 나도 맷돌 도는 박자에 맞추어 옴마니밧메훔을 뇌이다가 어느새
오후부터 하늘이 점점 컴컴해지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새벽하늘에 붉은 노을이 지면 비가 올 징조라는 속설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이곳 히말라야에도 들어맞는 말인가 싶었다. 나는 배낭에서 판초 우의를 꺼내 입었으나, 총누리는 그냥 비를 맞으며 걸었다. 길은 산비탈로 이어지다가, 산모롱이를 에돌다가 계곡 아래로 내려서고 조그만 나무다리를 건너 다시 비탈로 이어졌는데, 그사이 빗방울은 점점 굵어졌다. 이날 목적지인 킹쿠르딩 곰파까지 가려면 비탈길을 두 시간 이상 올라야 하는데 빗줄기 속에서 미끄러운 비탈길을 걷는 건 무리였다. 총누리를
나에게는 점심 먹을 시간이지만 총누리에게는 아침 먹을 시간이었다. 걸음을 재게 놀려 앞서간 총누리가 어느 농가 앞에 서서 싱긋이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집에서 밥을 먹자는 신호였다. 마을의 다른 농가들처럼 그 집도 3층집이었다. 짐을 멘 채 오르기에는 비좁고 컴컴한 계단을 밟고 3층으로 올랐다. 1층은 축사 겸 창고, 2층은 기도실 겸 침실이었으며 3층은 부엌 겸 거실이었다. 앉은뱅이 식탁이 길게 마련된 거실에는 앞서갔던 나왕 초상 셰르파 일행이 앉아 해장술로 창(막걸리)을 마시고 있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총누리와 나왕은
절쿠의 셰르파 호텔은 전깃불이 환했다. 뿐만 아니라 텔레비전으로 인도 영화를 보고 있었다. 위성 안테나로 전파를 잡는 컬러텔레비전이었다. 집주인에 의하면 전등과 텔레비전에 필요한 전기는3 년 전에 카트만두에서 큰돈을 주고 구입한 3 킬로 와트짜리 소형 수력발전기에서 나온다. 우리와 함께 온 나왕 초상 셰르파가 카트만두에서 운반한 짐 중에는 이 집의 위성 안테나와 발전기에 쓰는 부속품도 들어있었다. 나왕 초상 셰르파가 데우라리나 반달에서 멈추지 않고, 이곳 절쿠까지 기를 쓰고 온 것은 그 물건을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절쿠의 셰르파 호
데우라리 고개에 올라서 바라보니 피케 정상부는 구름에 잠겨있었다. 바람이 불었고, 구름도 이내 벗겨질 것 같지 않았다. 이런 날씨라면 차라리 반달로 내려가서 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달은 데우라리에서 빤히 내려다보였다. 길은 내리막길, 한 시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는데, 나왕 초상 셰르파가 우선 목부터 축이고 보자며 주막집으로 이끌었다. 나왕보다 나이 들어 보이는 주막집 주인은 나왕과 절친한 사이로 보였다. 알고 보니 이 주막집 주인 역시 총누리나 나왕 초상 셰르파처럼 오컬둥가
새벽 6시에 요란한 경적 소리가 들렸다. 지리에서 카트만두로 떠나는 첫 버스의 출발 신호였다. 밖은 아직 깜깜했지만 오래지 않아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침낭에서 빠져나와 여장을 차린 후 아래층에 내려가니 안주인이 머그 컵 가득 차를 내왔다. 셰르파를 위시한 티베탄 계열의 히말라야 원주민들이 즐겨 마시는 버터 티였다. 차 끓인 물에 버터를 녹이고, 곡물 가루와 소금으로 가미한 버터 티를 셰르파들은 '소찌아’라고 부르는데, 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해장으로도 좋다. 안주인은 거푸 두 잔의 소찌아를 권한 뒤, 옥수수로 빚은 창(막걸리)
타파팅의 음식은 내 입맛에도 맞았다. 쌀밥과 녹두죽, 싹(갓 비슷한 토종 푸성귀)과 감자를 함께 볶은 떨꺼리(반찬의 총칭)는 정성이 깃든 것이어서 그만하면 흡족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집 여자들이 빚은 술(창과 락시)에 토속적인 향취가 진하게 배어있어 좋았다. 주막집 타파팅에서 하룻밤 묵어가는 청년들 가운데 서넛은 네팔 제헌의회 의원을 선출하는 총선거의 투표권을 얻기 위해 고향으로 주민등록을 내러 가는 길이었다. 앙 도로지의 고향 친구라는 중년 사내 나왕 초상 셰르파도 타파팅에서 만났다. 그는 우리와 같은 버스로 여러 가지 물건
앙 도로지 씨가 소개한 총누리 셰르파는 스물세 살 먹은 건장한 청년이었다. 고향 파부르(빠뿌레)에서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닌 후 농사를 거들다가 승려였던 동생과 함께 카트만두로 나와서 트레킹 포터(짐꾼)로 일한지 4년이 되었다고 했다. 4년 동안 그가 경험한 산은 칸첸중가, 마나슬루, 르왈링,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 랑탕 등이었다.형제는 트레킹 시즌이 아닌 여름이나 겨울에는 고향에 돌아갔다가 봄 가을에 다시 카트만두로 나와서 트레킹 일거리를 찾는다고 했다. 아직 겨울인 한 달 전부터 카트만두에 나와 있었다는 총누리는 나와 함께 다
2007년 2월 14일 정오 무렵, 카트만두 시내에 하얀 꽃잎 같은 눈이 펄펄 날렸다. 네팔 현지인들은 난생처음 눈을 본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반겼다. 카트만두에 눈이 내리기는 실로 62년 만의 일이다. 나도 덩달아 들떠서 펄펄 날리는 눈을 맞으며 앙 도로지 셰르파를 찾아갔다. 그는 내가 가서 걷게 될 피케 기슭이 고향이어서 피케에 관한 풍부하고 생생한 정보를 주고 있었다.또한 그의 고향 사람들을 트레킹 가이드나 포터로 소개해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앙 도로지는 엄연한 네팔 사람이지만, 우리 한국인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