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관솔이란 잘게 쪼갠 소나무 옹이를 말한다. 송진이 짙게 배어 있어서 불이 잘 붙고 오래 타기 때문에 불쏘시개로 쓴다. 관솔은 아궁이에 장작을 때서 밥하는 산골 부녀자들에게 아주 요긴한 물건이다. 아궁이의 불씨가 꺼져 새로 불을 지펴야 할 때 쓰는 불쏘시개로는 관솔만한 게 없다. 그래서 부엌 한 쪽 선반 위에 잘 모셔 둔다. 정월 대보름 불놀이를 위한 횃불을 만들 때도 군데군데 관솔을 끼웠던 기억이 난다. 강원도 삼척군 대이리 귀틀집 벽의 코클에도 관솔을 땠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의 나는 관솔이 소나무의 뼈
부를 가져다 주는 여신 락시미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금잔화다. 힌디어로는 '사야파트리', 영어로는 마리골드( Marigold), '마침내 행복하리라'가 꽃말인 이 황금색 꽃은 티하르 무렵에 절정을 이룬다.인도와 네팔의 모든 마을에서 정성들여 가꾼다. 신에게 치성을 드리고, 사람과 가축의 무병장수를 빌고, 축제를 기리는 데 쓰기 위해서다. 꽃목걸이를 만들어 집 지키는 개의 목에 걸어 주고, 일하고 젖 주는 소의 목에 걸어주고, 먼 길 떠나는 가족의 목에 걸어 준다. 오늘 같은 티하르 명절에는 모든 문을 금잔화로 치장하여 여신 락시미가
가이 자트라는 집에서 기르는 소의 노고를 위로하는 의식이다. 개에게 그랬던 것처럼 소의 목에 금잔화 꽃목걸이를 걸어 주고 소가 좋아하는 밀기울 같은 것을 대접한다. 소들은 이 날이 자기들 날인 줄 아는 것처럼 대접 받는 태도가 천연덕스럽다. 부인네들이 붉은 흙을 곱게 바른 문지방 밑 축대 위에 초콜릿 케이크 같은 똥을 한 덩어리 떨어뜨린들 야단치는 사람도 없다. 앙 다와 씨에 의하면 이런 대접을 받으며 눈물 흘리는 소들도 있다고 한다. 그런 소들은 전생에 인간이었으며, 다음 세상에는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는 소들이라고 했다.
티하르 명절 아침이다. 짐을 진 조랑말들이 비를 맞으며 걸어간다. 조랑말의 엉덩이와 길바닥 돌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묘한 화음을 이루며 아프게 들린다. 여기는 돌포 바잘의 네왈리 마을. 주막집과 점포들이 길가에 늘어선 마을. 낮에는 소를 위한 가이 자트라가 있고, 밤에는 부자가 되게 해주는 락시미 뿌자가 있다. 어느 집에선가 쿵쿵 절구질 하는 소리가 난다. 비는 오다 말다하고, 우리는 기어이 장에 나와 해장술을 마신다. 어린이처럼 작고 천진한 라이 영감과 할망의 좁고 허름한 주막집이다. 아침부터 혀 꼬부라진 체뜨리 영감이 술주정을
파부루로 가는 물바토(큰 길)에 내려섰을 때 베니가트에서 만났던 체왕 곰파 스님을 다시 만났다. 스님은 커다란 상자를 등에 업은 짐꾼을 데리고 있었다. 그 상자의 포장으로 보아 한 시간 전에 파부루에 내린 비행기에서 인수한 물건인 듯했다. 30 대의 체구가 우람한 그 스님은 우리가 곰파에 머물지 않고 그냥 내려온 것이 섭섭한 듯했다. 쉬지 않고 빠르게 걸어서 파부루를 통과하고, 3시 경에는 살레리를 통과했다. 본의 아니게 준베시라는 큰 동네를 며칠 경험한 우리는 경찰서나 비행장이 있는 파부루나 살레리에서 묵는 것에 흥미를 잃었던 것
준베시를 떠나는 날 아침에야 해가 나왔다. 맑은 겨울 아침 같은 햇살 속에 나오니 몸도 가벼워진 듯 했다. 여러 날 쉬고나서, 아직도 약에 취해 있는 몽롱한 상태에서 길을 걷는 일은 오히려 즐거웠다. 7시부터 9시까지 두 시간에 걸쳐 산책 같은 걸음으로 나징 마을 삼거리 주막집에 도착했다. 차를 마시며 들여다보니 부엌이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어 음식에 관한 사우니(주부의 높임말)의 자부심을 보는 듯했다. 이 집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으리라 작정하고서 달밧떨커리를 주문하였다. 사우니는 쌀을 씻고, 사우니의 초리(딸)는 반찬거리를 다
과연 아침 차 마시는 시간에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젊고 잘 생긴 그는 아침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만 진료를 한다면서 그 사이에 진료소로 오라고 했다. 진찰권은 외국인의 경우 50 루피, 내국인은 15루피이며, 약은 무상으로 준다고 했다. 준베시의 이 진료소는 3년 전부터 오스트리아 사람이 스폰서가 되어 주고 있다고 했다. 카트만두의 트레킹 회사 대표인 앙 치링 셰르파가 대표하는 NGO에서 관리하는 이 스폰서쉽은 의사 1명, 간호보조사 1명, 그리고 각종 의약품을 지원해 주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우선 툽텐 체링 곰파를 거쳐 팡
이 날 밤 이 집에는 많은 손님들로 제법 북적였다. 우리가 디히로를 먹기 전부터 옆집 소녀 장무 셰르파(15세)가 와 있었다. 그녀는 일손을 도와주러 왔는지 오자마자 부엌일을 거들었다.디히로를 먹고 난 후에는 독특한 행색의 아버지와 딸이 하룻밤 유숙을 위해 찾아 들었다. 좁끼오(야크와 물소의 교배종) 등에 쌀을 싣고 팔러 다니는 셰르파 부녀였다. 이들 부녀는 이 날 새벽에 고리(나울에서 차울라카르카 가는 도중에 있는 마을)에서 출발하여 밤중까지 걸어왔다고 했다. 아버지를 따라온 소녀 다띠 셰르파는 열 살이라고 했지만 내 눈에는 일곱
오다 말다 하는 비를 맞으며 주인을 부르고 있자니 초로의 부인이 흙이 잔뜩 묻은 손을 털며 나타났다. 채마밭에 쭈그리고 앉아 김을 매다 온 것 같았다. 앙 다와 씨가 부인에게 숙식이 되겠냐고 물으니 그녀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쌀이 없다고 했다. 그녀의 생각에는 우리가 쌀 아니면 안 먹는 부자들이었던 거다. 내가 나서서 네팔 말로 거들어 봤다. - 사우니, 써머시아 차이나. 하미레 알루 뻐니 카누 훈차, 먹거이 뻐니 카누 훈차. (부인, 문제없습니다. 우리는 감자도 먹고 옥수수도 먹습니다.) 내가 네팔 말을 하자 아낙네는 놀랍다는
앙 다와 씨에 의하면, 설산 가우리상칼의 티베트 식 이름은 초무치링마이다. 가우리상칼은 힌두식 이름일 거라는 정도는 짐작한 바 있지만 초무치링마에 대해서는 전혀 듣지 못했다. 구름이 점점 차올라 가우리상칼의 소라 고동 끄트머리 같은 그 뾰족한 정상만 간신히 남겼을 때 우리는 제세 반장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응달진 곳으로 난 비탈길은 군데군데 이미 얼어 있었고 무너진 곳도 있어서 조심스러웠다. 이윽고 제세 반장이 발밑에 보이는 비탈에서 람주라라 능선 쪽을 바라보니 그쪽에는 시커먼 구름이 엉키고 있었다. 비나 눈이 올 조짐이었다. 우리
나울의 새벽도 피케 마네 못지않게 추웠다. 날이 밝기 전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더니 날이 밝으면서 구름이 흩어지고 햇살이 났다. 설산 가우리상칼의 뾰족한 봉우리 끝이 나타나고, 룸불 히말도 그 위용을 드러냈다. 산책 삼아 나울 마을의 능선 길을 거닐며 사진을 찍었다. 아침 식사는 샥빠(셀파 스튜, 수제비 비슷한 음식)였다. 화덕 앞에서 샥빠를 먹다가 눈을 들면 부엌문 밖으로 햇살에 빛나는 설산이 보였다. 날이 개는 걸 보니 다시 피케 정상에 올라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몸이 무겁고 기침이 심해서 포기하기로 했다. 앙 다와
치즈 공장을 지나 나울 마을 어귀에 이르자 또 다른 마네가 보였다. 마을 가까이 있어서인지 장식이나 구조에 훨씬 정성을 드린 듯했다. 식전에 두 시간, 식후에 두 시간, 모두 4시간을 걸은 이 날 일찌감치 여장을 푼 집은 바로 나왕 린지 라마네 집이었다. 이 날은 종일 날이 흐려서 몰랐는데 날이 갠 다음 날 아침에 보니 부엌 문 밖으로 설산 눔불 히말과 가오리상칼이 보였다. 여장을 푼지 두어 시간 후에 나왕 린지 라마가 피케 마네에서 내려와 우리에게 마을 곰파를 보여 주었다. 나왕 린지 라마가 거처하는 방도 있는 그 곰파의 대웅전에
피케 마네의 옛 치즈 공장에 돌아오니 잠시 구름이 걷히는 듯했다. 그래서 일찍 내려와 버린 것을 후회했다. 피케 정상에서 네팔 히말라야를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즉 동쪽의 칸첸중가에서 서쪽의 다울라기리 산군까지 파노라마로 조망해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아무리 춥고 바람이 심하게 불고 기침이 심했어도 좀 더 기다렸어야 마땅했다는 자책마저 들었다. 그러나 후회는 잠시에 그쳤다. 다시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모여 들어 앞을 분간하기조차 어려웠다. 김 선생은 변함없이 서 있는 설산보다도 설산을 감싸고도는 변화무쌍한 구름의 조화가
피케 마네로 가는 능선에는 이런 마네들이 서너개 쯤 있다. ⓒ김홍성 앙 다와 씨는 이곳의 마네를 벽으로 쓰는 창고 같은 움막을 특별한 날에 스님들이 올라와 거주하면서 기도 하는 장소라고 했다. 현지의 셰르파들은 '피케 마네'라고 부르는 이 마네는 지도에 피케 베이스캠프(해발 3840 미터)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우리는 마침내 그곳에 도착한 것이었다. 피케 마네에는 오래 전에 문 닫은 치즈 공장이 있었다. 피케 마네의 치즈 공장은 사람들이 모두 철수하고 아무도 없다고 들었는데, 늙수그레한 사내 둘이 공장 부속 건물의 지붕에서 널판자를
기온이 영하일 때에는 배터리가 오래 가지 않는다. 그걸 잘 몰랐던 때에는 괜히 배터리 가게 주인만 욕했다. 사용 가능 기한이 다 됐거나 불량품을 팔았다고 생각했다. 산에서 내려가면 불량 배터리를 판 카트만두의 수퍼마켓 주인을 찾아가 따져보려고도 했다. 나는 내 조그만 디카를 우모복 속 겨드랑이에 끼고서 샛별을 바라봤다. 샛별이 흐릿해지기 시작하면서 능선 주변의 하늘이 시시각각 오묘한 색채로 변하고 있었다. 나는 겨드랑이에서 디카를 꺼내어 한 두 방 찍고는 다시 겨드랑이에 넣어야 했다. 내 디카는 봄 순례 때 고장 나서 버린 것과 같
이곳 불부레에서 두 시간을 내려가면 똘루 곰파가 나온다. 지난봄에는 똘루 곰파까지 왔다가 눈이 너무 쌓여 있어서 불부레로 오지 못하고 자프레로 빠졌다. 자프레도 이곳 불부레에서 두 시간 거리다. 똘루 곰파로 내려가다가 좌측으로 갈라지는 길이 자프레로 가는 길이다. 불부레에서똘루 곰파 쪽으로 두어 시간 거리인 마이다네에는 앙 다와 씨의 농막이 있다. 앙 다와 씨의 부인과 자녀들은 현재 마이다네의 농막에 머물며 가축을 기르고 밭농사를 짓고 있는데, 눈이 오기 전에 빠쁘레 마을로 철수했다가 봄에 다시 마이다네로 올라온다고 했다. 앙 다와
어젯밤, 재봉틀 빈대에게 시달리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잔 김 선생은 집 뒤에 텐트를 쳤다. 카트만두에서 구입한 이래 여태 배낭에 달고만 다니다가 이 날 처음 펼친 것이었다. 고산병 예방약을 먹은 김 선생은 낮잠 한 숨 잘 잤다는데, 안 먹은 나는 호흡이 편치 않아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이 들락말락 할 때마다 호흡이 딱 멈춰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고소에서 오는 아주 가벼운 고산병 증세 중의 하나였다. 따굴릉에서 곧장 피케 베이스캠프로 갔다면 틀림없이 고산병으로 고생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불부레에서 종일 빈둥대
따굴릉의 카지 셰르파 씨에 의하면 이즈음 피케 지역은 낮 12시부터 구름이 끼기 시작하여 밤 12시가 되면 구름이 서서히 걷힌다. 새벽 4시 경에 소변보러 마당에 나와서 본 밤하늘에는 구름이 한 점도 없었다. 보라색이 감도는 쪽빛 하늘에 별들만 가득했다. 특히 하늘 한가운데를 가로지른 은하수에는 별들이 하도 촘촘하여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도 없었다. 여명에 따끈한 차를 마시고, 아침 햇살이 따스하게 퍼지기 시작한 7시 경에 불부레를 향해 따굴릉을 떠났다. 따굴릉 능선에 난 길은 봉우리 하나를 남쪽으로 에돌아 반대편에서 오는 능선으로
밤중에 온 사내들과 소년들은 날이 새기 무섭게 행장을 꾸려 비탈길을 내려갔다. 두 시간 후, 우리가 마일리 가웅의 바스넷 씨 집을 떠날 때 바스넷 씨의 외동딸은 광에서 맷돌로 옥수수를 갈고 있었다. 선물로 줄 게 없어서 볼펜, 연필, 색연필 등이 든 내 필통을 줬더니 예쁘게 웃었다. 길은 경사가 급한 산비탈 경작지 사이로 이어졌다. 숨이 차서 자주 멈춰서야 했는데, 멈춰 서서 돌아볼 때마다 앞산 너머 설산이 쑥쑥 커지고 있었다. 산비탈 따망 마을의 주막집에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일어서 걸으니 길은 아름드리 전나무 숲속으로 이어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