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좋은 날 고모네 집 대문에 들어서면 마당 가득 하얀 이불 호천이 널려 있었다. 고모네 여인숙에는 손님방이 열 개가 넘었고, 단 하룻밤이라도 손님이 자고 나간 방의 이불 호천은 반드시 뜯어서 빨아 널어야 직성이 풀리는 고모였다. 얼추 말라서 풀이 뻣뻣해진 호천은 밤늦도록 방망이로 다듬이질을 하고 숯불을 피워 넣은 다리미로 다림질까지 해서는 이불에 씌워 꿰매 놓아야 잠이 온다는 고모이기도 했다. 햇살이 가득한 한낮, 고요한 마당의 풀 먹여 널어놓은 이불 호천에서는 흰 눈 위에나 어리는 옅은 푸른빛이 감돌았고 비릿한 풀냄새가 풍겼다
자다 깨보니 메주 냄새 나는 컴컴한 방이었다. 옆에 아무도 없고 밖은 조용했다. 창호지 구멍으로 들어오는 한줄기 햇살이 방바닥에 비스듬히 꽂혀 파르르 떨고 있었지만 아주 낯선 방은 아니었다. 그 방은 괸돌 마을 충열이네 집 건넌방이었다. 어둠을 꿰뚫은 한줄기 빛살 속에는 수많은 먼지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나는 그 빛살을 만져보고, 빛살이 들어오는 창호지 구멍을 손으로 가리기도 해보다가 마침내 창호지 구멍에 눈을 갖다 댔다. 환한 봄날의 풍경이 거기 있었다. 빈 외양간 너머로 동산이 보이고, 동산에는 진달래꽃이 피어있었다. 어떤 진달
어머니와 고모가 빨래하러 가는 개울가에는 해방촌이라는 동네가 있었다. 해방촌에는 이북에서 피난 내려온 사람들이 판잣집을 짓고 살았는데, 우리 동네에서 뜨물 할머니라고 불렀던 할머니도 해방촌에 살았다. 뜨물 할머니는 반으로 자른 드럼통을 손수레에 싣고 돼지 먹일 뜨물을 거두러 다녔다. 해방촌에는 돼지 치는 집이 여럿 있어서 뜨물을 거두러 다니는 분들도 여럿이었지만 우리 집이나 고모네 집 같은 함경도 출신 집안의 뜨물은 그 할머니 몫이었다. 개나 돼지 먹이도 귀했던 그 시절에는 뜨물도 귀했기에 주부들은 뜨물을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집
내 또래의 고만고만한 아이들은 길가에 나와 똥을 누면서 자랐다. 늘 굶주리는 동네 개들은 아이들 똥으로 속살이 토실토실 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도 부지런해야 더운 똥을 먹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아이들이 국도변에 나와 앉아 똥을 누고 있노라면 부지런한 개들이 슬그머니 다가와 아이들이 누는 싱싱한 똥 냄새를 음미하는 것이었다. 똥을 다 누고 나면, 좀 큰 아이들은 들고 나온 신문지 같은 것을 찢어 스스로 밑을 닦지만, 아주 어린 아이들은 노래하듯 멜로디를 실어 제 엄마를 불러댔다. - 엄마, 나 똥 다 눴어. 밑 닦아 줘. 엄마
가평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이제 점점 희미해진다. 그러나 내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거기 남아 있다. 켜켜이 묵은 시간이 드리운 두꺼운 장막에도 좀 먹은 구멍은 있어서 거기 눈을 대면 어두운 방 아랫목에 놓인 화롯불처럼 희미한 할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그것을 첫 장면으로 하여 어린 시절 몇 토막이 무성 영화 필름처럼 돌아간다. 내 기억의 가평 할머니는 늘 화로불 앞에 앉아 있다. 풀색 군용 담요로 만든 바지저고리 차림이고, 쪽진 머리에 백동비녀를 꼽았다. 그리고 봉초 담배를 말아 피운다. 나는 할머니의 화로 곁에
피케 순례의 마지막 날, 마침내 지리의 시장통에 들어섰을 때였다.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마주 오는 사람들 속에서 '안녕하십니까'하며 반갑게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지리 시장통 초입에서 여인숙 겸 식당인 체르둥 롯지를 운영하는 비제이 지렐(30 대 초반)씨였다. 지난 봄 순례의 마지막 밤을 그의 롯지에서 묵었을 뿐인데 첫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지렐(Jirel)이라는 성이 말해 주듯이 그는 지리의 토박이이며, 지리를 거쳐 간 수많은 트랙커들 사이에서 잔뼈가 굵었기에 여러 나라의 인사말을 구사할 줄 알았다. 그는 나에게 영어 불어
청명한 아침이어서 피케가 잘 보였다. 잘 하면 오늘이 이번 순례에서 마지막으로 피케를 바라보는 날이라 생각하니 피케의 자태가 새삼스러웠다. 피케 정상을 시계의 중심에 놨을 때 우리의 현 위치는 7시 방향이었다. 3주 전에 우리는 8시 방향인 지리에서 피케로 접근하여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크게 돌아 이제 지리로 빠져나가는 것이다.3주전, 우리는 순례를 시작하면서 배에 왕짜王字가 새겨질 때까지 걷기로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데는 한 달이면 족하다고 나는 장담했었다. 한 달 내리 걸으면 배에 왕짜가 새겨진다는 이야기는 결코 터무니
12시 30분에 삐르티 마을의 주막집에 들어섰다. 젊은 짐꾼 셋이 달밧떨커리를 먹고 있었던 이 주막집의 남편은 체뜨리, 부인은 순왈이었다. 우리도 같은 것을 시켜 놓고 마당에 나와 지도를 펼쳐 놓고 우리가 온 길을 되짚어 보았다. 랄람의 해발 고도는 대략 2200 미터, 우리가 건너온 리쿠 콜라의 해발 고도는 대략 1100 미터, 그리고 삐르티는 1820 미터. 그러니까 우리는 오전 중에 1100 미터를 내려왔다가 다시 720 미터로 올라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 날 우리가 여장을 푼 껄접께 마을의 해발 고도는 2,600 미터였으니
도보 21일 째 되는 날의 첫 길은 유채밭과 메밀밭 사이로 나 있었다. 아침 햇살이 들기 시작하여 꽃빛이 고왔다. 새파란 하늘을 업은 설산은 어느 때보다 가까이 보였다. 그러나 미끄러운 비탈길이어서 발밑을 살피느라 멀리 내다볼 여유가 없었다. 반시간 쯤 걸은 끝에 8시가 되었고, 우리는 랄람 마을의 중심지에 도착했다. 식전에 러빈 순왈의 장남 틸럭 바하둘 순왈(16세)이 라면을 사 온 가게가 이곳에 있었다. 우리가 내려오는 데만 30분이 걸린 길을 그 아이는 30 분도 안 걸려서 왕복한 것이었다. 현지 젊은이들은 랄람에서 지리까지
러빈 순왈 씨는 부인 인드라 마야 순왈(35세)씨 와의 사이에 아홉 자녀를 두었다. 부인 인드라 마야 순왈이 15세에 시집와서 16세에 본 장녀 차미나 순왈은 2년 전에 이웃 마을로 출가하였다. 현재 19세다. 나머지 여덟 남매는 아래와 같다. 차녀 꺼멀 꾸마리 순왈, 18세, 10 학년. 장남 틸럭 바하둘 순왈, 16세, 9학년. 삼녀 리투 순왈 14세, 7학년. 차남 빠담 바하둘 순왈, 12세, 6학년. 삼남 케살 순왈 10세, 3학년. 사녀 빠담 꾸마리 순왈, 7세, 2학년. 오녀 살미라 순왈, 6세, 1학년. 사남 러메쉬 순
길은 잠시 완만해지더니 다시 긴 오르막으로 이어졌다가 계곡으로 내려섰다. 외딴집들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는 계곡 끝의 어느 집 샘가에 이르러 짐을 풀고 잠시 쉬었다. 그 집 부인에게 청해서 더히(요구르트)를 큰 컵으로 한 컵 씩 먹고 돈을 내려고 했더니 그 아낙이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파이사 뻐르다이나. 바토 자누 만체라이 더히 엑 길라스 디에 뻐치 파이사 버나우네 람로 차이나. (돈 필요없어요. 나그네에게 더히 한 컵 주고 나서 돈 받는 거 안 좋아요.)네팔 산중을 돌아다닌 지 꽤 오래 되었지만 이렇듯 딱 부러지게 돈을 거절하
앙 다와 씨의 식구들과 작별한 시간은 오전 9시 30분이었다. 앙 다와 씨의 아내가 릴두를 먹고 가라고 붙들었기 때문이다. 릴두는 일이 많아 시간도 오래 걸리는 음식이었으나 부인이 기울이는 정성을 생각해서 기다려야 했다. 앙 다와 씨네 릴두는 감자를 절구에 넣고 방아로 찧을 때 보릿가루를 넣고 찧어서 그런지 훨씬 맛있었다. 감자 수제비, 그러니까 릴두를 먹은 뒤, 아침 햇살이 따스한 집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앙 다와 씨는 마치 날마다 출근하는 회사원처럼 식구들에게 인사도 없이 앞장서서 걸었다. 저만치 걸어가서 돌아보며 손이라도
변소가 따로 없는 집이어서 저만치 사람 눈에 잘 안 뜨이는 밭고랑에 가서 앉았는데 바람에 실려 오는 흙냄새가 싱그러웠다. 풀냄새, 꽃냄새, 두엄냄새에 나무 타는 냄새까지 느껴졌다. 좀 있다가는 밭고랑 여기 저기서 인분 냄새도 바람에 실려 왔다. 산에 오래 있으면 시각 청각 뿐 아니라 후각도 발달한다. 우리나라 어느 산에 있을 때는 십 리 밖에서 올라오는 여성 등산객들의 비누 냄새를 맡은 일이 있다. 삼십 리 밖 암자에서 치는 새벽 목탁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하얀 집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 육중한 앞산 너머로 흰 구름이 떠가고, 어
자프레의 셀파 호텔에서는 감자 졸임 말고도 토종 배추의 일종인 싹이라는 채소 졸임이 반찬으로 나왔다. 달(녹두죽의 일종)도 걸쭉하니 맛이 좋았다. 오랜만에 아주 만족스럽게 먹고 이도 닦은 후에 아직 덜 마른 양말 네 켤레를 배낭에 주렁주렁 매단 양말 장수 행색으로 다시 길을 떠났다. 지난 2월 하순에는 눈이 무르팍까지 쌓여 있던 똘루 곰파에서 오는 길을 거슬러 가는 것이다. 능선이 나오고, 석경담이 나왔다. 석경담과 나란히 난 길 끝에서 길은 갈라지는데, 곧장 가는 길은 불부레로 가는 길이었다. 좌측으로 난 길이 똘루 곰파로 이어지
저녁을 먹고 무료히 앉아 꺼져가는 아궁이 불을 쬐고 있는 중에 한 떼거리의 심상치 않은 나그네들이 들어왔다. 몸집이 좋은 중년 여성 한 명을 포함한 남자 7-8 명인데, 그 중 두 남자는 커다란 쿠쿠리를 배에 차고 있었다. 쿠쿠리를 찬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청년인데 가슴에 붉은 별 마크를 달고 있었다. 일행 중 셰르파로 보이는 젊은 남자는 무전기와 휴대폰을 갖고 있었는데 앙 다와 씨의 동네 사람인 듯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들은 라면 세 개를 끓여서 나누어 먹고는 회의를 벌였다. 밤이 깊었으니 주막집에서 자고 다음날 새벽에 내려가
아침 7시 30분에 무레 다라를 나섰다. 날씨가 좋아서 설산들이 후련하게 보였다. 파탈레 파티를 향해서 오르막을 걷는 중에 하얀 자루들을 운반하는 조랑말들과 마부들을 만났다. 자루에 든 물건들은 대부분 쌀이고, 설탕이나 밀가루도 있다고 했다. 그들은 전 날 오컬둥가에서 출발하여 파탈레 파티에서 자고 이 날은 살레리를 향해서 이동한다고 했다. 다사인 티하르 축제 기간의 방학을 집에서 식구들과 보내고 살레리의 학교 기숙사로 돌아가는 어린 학생들도 만났다.10 시 경에 파탈레 파티에 도착했다. 돌포 바잘만큼이나 큰 장이 서는 마을이라고
모든 축제가 끝난 이튿날인 11월 12일은 월요일이었고 하늘이 맑았다. 이튿날인 화요일에는 네레 바잘에 장이 서는 날이니 장날 구경하고 가라고 한사코 붙드는 구릉네 식구들과 작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차만 마시고 7시에 일어서려 했으나 결국 뚝바를 한 사발 씩 먹고 8시에 떠나게 되었다. 안주인 리라 꾸마리 구릉이 하얀 카닥을 들고 나와 우리들 목에 하나하나 걸어 주었다. 11시 경, 그러니까 3시간을 걷고 나서, 리라 꾸마리 구릉이 내 목에 긴 머플러처럼 둘러준 카닥을 벗었다. 솔루 콜라를 건너는 출렁다리 위였다. 이 쪽 산비탈
줄리의 아버지 자갓 바하둘 구릉(62세)은 퇴역 군인이었다. 인도군 용병으로 청춘을 바친 덕분에 매달 연금을 받는다고 했다. 우리가 하룻밤 묵었던 이층 큰 방의 장식장에는 인도 영화배우들의 브로마이드 사진들이 붙어 있고 가족사진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한가운데 있는 오래된 흑백 사진의 주인공이 바로 자갓 바하둘 구릉이었다. 스무 살이나 됐을까. 부대 마크와 훈장을 단 군복에 공수병 베레모를 쓴 자갓 바하둘 구릉의 얼굴은 막내아들 사전의 형처럼 앳되었다. 키도 아주 작았다. 그러나 그는 60 회 이상 낙하산을 펼친 경력이 있으며,
주막집 내외의 장녀 줄리(23세)는 살레리에 있는 솔루 쿰부 멀티플 캠퍼스라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우리 학제로는 대학교 2-3 학년에 해당하는 15 학년인 줄리는 살레리 돌포 바잘에 있는 SOLU FM 라디오 방송국 리포터도 겸한다고 했다. 줄리의 여동생 셋과 남동생도 모두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키란(20셋)과 사리따(18세)는 11학년, 짠다(16세)는 8학년, 그리고 막내이자 외아들인 사전(14세)은 9학년이었다. 다섯 자녀 모두 학교에 다닌다는 것 만으로도 다복한 가정이었다. 티하르 축제의 마지막 의식이기도 한 바이 티카
장터 입구의 이발소에서 삭발을 하고 콧수염도 다듬고 숙소로 돌아와 늦은 아침을 먹었다. 정오 직전에 수레스타 씨 가족과 작별하면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후 네 시간을 걸어서 도착한 마을이 네레 바잘이었다. 나중에야 확실히 알았지만 네레 바잘은 소풍의 주방장이었던 겔루 셀파의 고향이었다. 그러니까 겔루의 아내이며 현재의 주방장인 마야 셀파의 시댁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부주방장인 사노 마야 셀파의 고향도 네레에서 멀지 않았다. 김 선생과 내가 네 시간 동안 걸은 그 길은 겔루 셀파 부부와 사노 마야 셀파 등이 무던히도 오고간 길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