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길을 되짚어서, 그러니까 실리콜라 강을 거슬러서, 끝없이 이어지는 서글픈 상념에 잠겨서, 흙먼지 이는 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걷는 중에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누가 따라오는 것 같았지만 따라 오는 사람은 없었다. 따라 오던 사람은 상념 속에 스쳤던 어린 시절의 나였다. 이제는 나라고 할 수도 없는 그 소년이, 이제는 나라고 할 수 없는 그 사내를 따라가고 있었다. 한 시간 이상 그렇게 걸어서 마을과 마을 사이의 한적한 길에 접어들었는데, 길가 언덕 위에 서 있는 나무가 보였다. 실리콜라를 따라 일본 청년들과
일본 청년들은 저마다의 상념에 젖어서 뚝뚝 떨어져 걷고 있었다. 나는 맨 뒤에 한참 떨어져서 걸었다. 내 앞에 가는 한 일본 청년은 산모퉁이 길로 접어들 때마다 돌아서서 손을 흔들었다. 다르질링으로 가는 막차가 떠날 시간이 가까워졌으므로 어서 오라고 보내는 신호였다. 염려 말라는 뜻으로 나도 손을 흔들어 주다보니 나는 길 떠나는 식구를 배웅하러 나온 그 동네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멀리 떠나온 게 아니라 돌아와 있는 것 같았다. 길가의 마을들은 그토록 친숙했다. 마을마다 까말라가 입은 것과 같은 종류의 손뜨개 스웨터를 입은 아이들
이튿날 아침에 보니 룸부네 집 부엌에 어린 소녀가 있었다. 먼 산동네에 사는 친척 집에서 데려다 기르는 소녀라고 했다. 장작을 나르고, 물을 길어 오고, 그릇을 씻는 등 허드렛일을 하면서 학교에 다닌다는 여덟 살 소녀의 이름은 까말라. 까말라는 연꽃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까말라가 입은 스웨터는 우리가 어렸을 때 입었던 것과 흡사했다. 주변 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절, 어머니들은 헌 스웨터의 실올을 풀어서 둥글게 감아놨다가 다시 스웨터를 떠서 아이들에게 입혔다. 까말라가 입은 스웨터는 바로 그것과 흡사했다. 얼핏 촌스럽게 보이지만 두
롯지의 주인 룸부 셀파는 고모부를 너무나 많이 닮았다. 천 년 만 거슬러 올라가면 조상이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강인해 보이는 뼈대와 질긴 근육, 불거진 광대뼈와 날카로운 눈, 쇳소리가 나는 음성……. 그러나 웃는 모습은 더 없이 순박해 보이는 것까지 닮았다. 그것은 몽골리언의 공통적인 특질일지도 모른다. 룸부 셀파는 60세라고 했다. 고모부는 그 나이에 이미 노쇠해졌지만 룸부 셀파는 나이답지 않게 건장했다. 그는 아직 해지기 전인데도 유쾌하게 취해서는 부인에게 술 한 병 더 가져오라고 했다. “좋은 술이다. 밑에 내려가
오후 2시. 람만을 향해서 출발. 존이 배웅해 준다며 따라나섰다. 키 큰 금송 숲 샛길을 타박타박 걷자니 노래가 절로 나왔다. 존은 내년에 대학에 가서 자연 과학을 공부한 후 특수 아동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연 관찰 학교 교사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오전에 산비탈에서 내려다보았던 사만딘 마을을 지나 람만 지역에 들어설 즈음 말 세 마리를 몰고 오는 청년 셋을 만났다. 한 명은 텍 호텔의 둘째 아들이고, 다른 두 명은 팔루트 산장의 산장지기와 그의 동생이었다. 셋 다 검은 고무장화를 신었다. 검은 고무 장화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우
다시 날이 밝았다. 변소에 가야 되고, 이를 닦아야 하고, 밥 먹고 길을 떠나야 하는 아침이 온 것이었다. 그런 일상이 권태롭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유리창 밖에는 햇살과 운무가 뒤섞이고 있었다. 운무 속에서 나무들이 나타났다 사라졌고, 파란 하늘이 보이기도 했으며, 운무를 뚫고 날아오르는 새가 보이기도 했다. 동쪽 하늘의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났다. 8시쯤에야 산장을 나서서 외벽에 세워둔 대나무 지팡이 하나를 챙겨 들었다. 하산 길은 파란 시누대 숲 사이로 나 있었다. 걷기 좋았다. 시누대 숲에서
8시쯤 팔루트를 향해 떠났다. 뒤따라 온 일본 청년들이 앞질러 갔다. 산등성이 길은 완만했다. 심한 비탈은 거의 없었다. 응달진 곳에서는 잔설(殘雪)을 밟고 걸었으며 때로는 랄리구라스 숲 사이를 걸었다. 우리나라 철쭉이나 진달래와 흡사한 랄리구라스의 붉은 꽃망울에는 하얀 눈꽃이 붙어 있기도 했다.하늘은 그날따라 유난히 파래서 머리에 물을 이고 걷는 듯했다. 산길은, 걸으면 걸을수록 오히려 멀어지는 듯한 칸첸중가를 향해 북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바람도 심상치 않게 불었다. 비나 눈이 올 것 같았다. 산닥푸
아침 6시. 바람은 여전히 사납게 불었다. 체왕 롯지 앞의 룽따는 곧 찢어질듯이 펄럭였다. 바람 때문에 고원은 더욱 황량하게 느껴졌다. 언덕 위에서 히말라야가 펼쳐져 있을법한 북쪽을 바라봤지만 히말라야 쪽에는 두꺼운 구름이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구름 위로 해가 솟고 금빛 햇살이 마을 골목을 비출 때 쯤 멀리서 뎅그렁 뎅그렁 쇠방울 소리가 들리더니 검은 소들이 허연 입김을 뿜으며 올라왔다. 이 소들은 고산의 소 야크와 저지대의 물소의 교배종인 ‘조’인데 등에 땔감을 잔뜩 짊어졌다. 체왕 호텔 부엌에서는 벌써 아침 준비하는 연기가
동트는 새벽에 눈이 떠졌다. 마을에 나가 여기저기 어슬렁거렸다. 네팔의 일람 쪽으로 통하는 골목길에는 새벽부터 옥수수단을 머리에 인 남자들이 지나갔다. 마을의 한 노파는 향로에 숯불을 피워 창 밖에 걸어 놓고 향나무를 올려 연기를 피웠다. 자못 경건한 모습이었다. 뭉클뭉클 피어나는 향연에서 새로운 하루가 느껴졌다. 8시 조바리 마을을 출발, 40분 정도 걸어 갈리바스(2621m) 언덕에 도착했다. ‘갈리바스’란 ‘대나무골’의 뜻이라는데 대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길가에 서너 채의 찻집이 늘어서 있었다. 맨 끝 찻집 마당에서 두 여인이
동포들도 트레킹을 떠난 그 날은 온종일 싱숭생숭했다. 그들 청춘남녀와 함께 떠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지금이라도 마니반장으로 가서 부지런히 걸으면 조만간 합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반기지 않을지도 몰랐다. 나는 개밥에 도토리가 되기 십상이었다. 나는 사흘 쯤 뒤에 출발하기로 작정하고 초우라스타 광장에 가서 트레킹에 필요한 지도와 판초 우의를 샀다. 사흘 후, 침낭과 우모복과 판초 우의를 배낭에 쑤셔넣었다. 사전과 회화 책, 일기장, 영양제, 안 입을 옷 등 알리멘트에 맡길 짐은 따로 보자기에 쌌다. 양철
그 날 오후, 유스호스텔의 임시 종업원 락바 라마는 다르질링을 떠났다. 그는 시킴의 수도 갱톡으로 가서 칸첸중가 트레킹 팀의 쿡으로 합류한다고 했다. 그가 손을 흔들고 사라진 언덕에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머리부터 쑥쑥 차례로 올라와 내 앞으로 걸어오는 그들은 몹시 지쳐 보이는 배낭여행자들이었다. "택시 탈 걸 그랬나 봐.""슬슬 나올 때가 됐어.""지도 다시 볼게."그들 중 하나가 걸음을 멈추고 손에 든 지도를 펼쳐보며 말했다."유스호스텔 ...... 이쯤 어디에 있을 텐데...." 그들 넷은 물어보지 않아도 동포였다. 오랜만에 듣
죽어 가는 붕어가 더러운 웅덩이의 수면 위로 떠오르듯 혼곤한 잠에서 깨어나고 있을 때 새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것처럼 새삼스러운 새소리였다. 애틋하고 귀여웠다. 잘 들어보니 한 마리가 우는 게 아니고 두 마리가 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둘은 나무 가지에 앉아서 혹은 이리저리 하늘을 날아오르며 운다는 것도 알았다. 종달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푸른 보리밭을 짓누른 끝없이 푸른 하늘이 떠올랐고 눈이 저절로 떠졌다. 폐유와 해조류가 뒤덮여 빛을 차단한 컴컴한 수면, 즉 합숙방 천장이 거기 있었다. 깨진 유리창과 그 창턱
날마다 운무 속을 돌아다니다가도 밥 때가 되면 알리멘트에 가서 밥을 먹었다. 점심은 길거리에서 군것질로 때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침저녁은 알리멘트의 식탁에 앉아 제대로 먹었다. 알리멘트는 유스호스텔의 부속 식당과는 달리 차림이 다양했고 맛도 그만하면 좋았다. 주문한 음식이 빨리 나왔다. 또한 타파 구릉과 그의 부인과 어린 딸 모두가 친절했다. 이따금씩 흘러나오는 옛날 팝송이 좋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그냥 눌러 앉아 식당 카운터 옆 책장에 수북이 쌓여 있는 오래된 비망록들을 들추곤 했다. 비망록에는 여러 나라 여행자들의
2월이 다 가도록 다르질링의 운무는 걷히지 않았다. 정말 지독한 운무였다. 하루라도 벽난로에 장작을 때지 않으면 침낭이 눅눅해져 버렸다. 벽난로가 식어버리는 새벽이면 기침이 났고 뼈마디들이 쑤셨다. 그런 새벽이면 침대에 누워 있기보다는 차라리 밖에 나가 걷는 게 편했다. 거의 날마다 운무 속을 걸어 다녔다. 새벽에는 광장과 순환도로와 티베탄 마을을 어슬렁거렸고, 낮에는 좀 멀리 떨어진 차밭이나 묘지나 곰파寺院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느라고 다르질링 일대의 그 무수한 산비탈 골목들을 샅샅이 헤치고 다녔다. 오죽했으면 티브이 타워 언덕
골목은 광장으로 이어졌다. 바람이 불어와 운무를 헤칠 때마다 광장에 늘어선 영국식 건물들이 드러났다. 대영제국 시대의 유물인 그 위압적인 건물들은 유령들이 사는 집처럼 보였다. 광장에 들어서자 광객들과 조우했다. 그들은 좁은 선실이 갑갑해서 바람 쐬러 갑판에 나온 선객船客들 같았다. 신혼부부도 있었고, 일가족도 있었다. 커다란 눈과 가무잡잡한 피부, 다소 수다스런 태도, 그리고 유난히 추위를 타는 것으로 보아 캘커타를 비롯한 벵골 지방 사람들이지 싶었다. 그들은 두꺼운 털옷에 털모자까지 쓰고도 덜덜 떨고 있었는데, 정말 추워하는 게
룽따 風馬 설산 칸첸중가를 처음 봤던 그 날 아침에 다르질링에서의 첫 산책을 나섰다. 들뜬 마음과는 달리 유스호스텔을 나와서 백 미터쯤 걸었을 때 다리가 휘청거렸다. 운무는 몇 걸음 앞이 안 보일 만큼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갈까, 이대로 더 걸어볼까, 망설일 때 운무 속 저만치 밝으레한 불빛이 퍼져 나오는 창문이 보였다. 불빛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간신히 옮겼다.불켜진 창이 있는 건물은 식당을 겸한 게스트하우스였다. 반가웠다. 들어가서 아침도 먹고 쉬고 싶었다. 현관문을 당겼다가 흠칫 놀랐다. 식당 안에는 뜻밖에도
락바 라마 유스호스텔의 늙은 종업원 이름은 락바 라마였다. 나이 오십이 넘어 보였는데 실은 사십이 채 안 된 사람이었다. 네팔의 동부 산악지방 출신, 18세에 인도 군에 지원 입대해 7년간 다르질링 인근에서 복무했다. 전역 후 트레킹 회사의 포터로 벌이를 하다가 독립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다르질링 유스호스텔에 오는 외국인 여행자들을 상대로 벌이를 해왔다. 때로는 쿡, 때로는 가이드, 때로는 포터라고 했다. 락바 라마의 이력을 그만큼이나마 알게 된 것은 사흘 내리 심한 몸살을 앓고 난 후였다. 사흘 동안 락바는 아침저녁으로 벽난로
다르질링산비탈 도로는 운무에 잠겨 있었다. 버스가 산굽이를 하나씩 돌 때마다 운무는 점점 짙어져서 눈앞의 길마저 희미하게 보였다. 운전사 오른쪽 맨 앞자리에 앉은 나는 깜박 깜빡 잠들다 깨곤 했다. 한 번 씩 잠에서 깰 때마다 운무는 더욱 짙어졌다. 버스의 노란 전조등이 휘젓는 푸른 운무 속에서 우중충한 집들이 나타났다. 칙칙한 색깔의 두꺼운 옷을 입은 야윈 사람들의 모습이 스쳤다. 그러다가는 다시 운무만 보였다.눈을 감으면, 수 십 년 전 다도해 뱃길이 출렁출렁 다가오기도 했다. 부글부글 끓는 것처럼 보였던 하얀 바다, 저 멀리
생일파티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는 T는 첫눈에 인연이라는 것을 믿었다. 나를 보고, 나의 목소리를 듣고, 언젠가 우리가 함께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인연보다 우연의 일치를 믿는 쪽이었다. 언제나 이별한 후에는 다음 이별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기이하게도 나는 T를 사랑했다.-네가 내게로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그런데 여기 네가 내 앞에 있잖아.-나도 너를 사랑하리라고는 어찌 알았겠어. 근데 내가 여기 네 곁에 있잖아.인생이 차라면 그 차의 운전대를 잡은 건 나였다. 나는 T에게
해변이 아름다운 작은 도시에서 사는 G는, 바다라면 연상되는 태양 빛에 그을린 탄탄한 피부를 갖고 있지 않았다. G가 하얀 머플러를 바람에 휘날리며 산책하는, 단순히 바다를 좋아하는 소녀인 줄 알았다. 거의 한 달 동안 바닷바람에 까맣게 탄 내 얼굴은 G의 하얀 낯빛과 대비되어 보였다. 그녀는 산에서 살았던 늑대 아이처럼 야성적이면서 어찌 보면 숲의 요정처럼 기묘하게 아름다웠다. 오후 해변이 보이는 거리를 산책할 때마다 나는 G와 만났다. 우리는 가벼운 인사와 눈웃음을 나눌 뿐이었다.하루는 그녀가 내가 두 달 예정으로 묵고 있는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