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파티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는 T는 첫눈에 인연이라는 것을 믿었다. 나를 보고, 나의 목소리를 듣고, 언젠가 우리가 함께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인연보다 우연의 일치를 믿는 쪽이었다. 언제나 이별한 후에는 다음 이별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기이하게도 나는 T를 사랑했다.-네가 내게로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그런데 여기 네가 내 앞에 있잖아.-나도 너를 사랑하리라고는 어찌 알았겠어. 근데 내가 여기 네 곁에 있잖아.인생이 차라면 그 차의 운전대를 잡은 건 나였다. 나는 T에게
해변이 아름다운 작은 도시에서 사는 G는, 바다라면 연상되는 태양 빛에 그을린 탄탄한 피부를 갖고 있지 않았다. G가 하얀 머플러를 바람에 휘날리며 산책하는, 단순히 바다를 좋아하는 소녀인 줄 알았다. 거의 한 달 동안 바닷바람에 까맣게 탄 내 얼굴은 G의 하얀 낯빛과 대비되어 보였다. 그녀는 산에서 살았던 늑대 아이처럼 야성적이면서 어찌 보면 숲의 요정처럼 기묘하게 아름다웠다. 오후 해변이 보이는 거리를 산책할 때마다 나는 G와 만났다. 우리는 가벼운 인사와 눈웃음을 나눌 뿐이었다.하루는 그녀가 내가 두 달 예정으로 묵고 있는 바
신발장 구석에 놓여있는 검은색 스웨이드 하이힐 한 짝을 보자 J가 떠올랐다. 그날 밤 그녀의 아버지는 정복을 입은 채로 현관문을 열었다. 장군은 나를 내려다보았고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가 눈을 부라리자 몹시 위축된 나는 빌려온 차 키를 떨리듯 흔들며 말했다.-저, 장군님. 따님을 모시고 가려고…….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 올해 장군 진급 대상자인 대령에게는 딸만 셋이 있었다. 특히 막내딸에 대한 사랑과 보호는 지나칠 정도인 장군은 자신의 소신인 금남의 집 원칙을 고수했다. 남자는 그 집에 얼씬거리지 못할뿐더
-자기 마초야?-자기 머저리야?S와 잠자리를 갖는 일은 늘 기분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언제 내가 주도권을 잡아야 할지, S에게 마냥 맡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터질지 모를 폭탄을 가지고 놀고 있는 기분이랄까. S는 평소에는 철저한 페미니스트였다.그러나 침대에서만큼은 예쁜 소녀처럼 굴었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스트립쇼를 보여주거나 내가 그녀 엉덩이를 세게 때려주기를 원했다. 얌전하게 굴다가도 어느 순간 돌변해서 나를 흥분시키고 자극했다. 그런 다음 날이면 나는 꽃다발을 사 들고 가서 그녀에게 바쳤다. 전날 황홀한 여운이 채
치열한 예술가의 정신은 매매 대상은 더욱 아니었다.자존감에 내상을 입은 P는 조용히 물러났다.P는 별 다섯 개를 받은 레스토랑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어 내 무릎을 감싸주었다. P의 우아한 손끝에서 온기가 흘러들어왔다. 성감대가 무릎인 내 하체에 전기가 흘렀고 그녀 역시 볼이 상기되어 달아올라 있었다.P는 내 다리를 파란색 하이힐 앞코로 간질이며 속삭였다.-저희 아빠 전용기가 있어요. 너무 바쁘셔서 그걸 사용할 시간이 없는 게 문제지만.P의 아버지는 재계의 거물이었다. 그녀는 그가 만든 왕국의 외동딸이었다. 항공회사는 물론 식구마다
이탈리아 식당 ‘몽로’에서 친구 소개로 V를 만났다. 그녀는 몸에 착 달라붙는 레깅스에 가슴골이 보이도록 파인 브이넥 티셔츠 차림이었다. 나는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감하였다. 테이블에 놓인 손톱은 인조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나는 고개를 숙이고 V가 신고 있는 흰색 하이힐을 자꾸 내려다보았다. 푸른 실핏줄이 발등으로 흘러내렸다. 하얀색은 야한 그녀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내 눈길이 닿은 무릎을 조금 벌린 그녀는 이왕 볼 거라면 확실히 보라는 눈치였다. V는 부끄러워하는 내가 귀엽다고 했다. 외양은 부드럽지만, 내면이
-아버님, 색깔이 너무 멋져요.사촌 동생 결혼식에 데려간 B는 내 아버지의 넥타이를 만지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정말이지 거저 줘도 안 맬 넥타이를 어디서 주워온 것일까. 나는 아버지 목에 걸린 촌티 나는 총천연색 새끼줄을 다시 바라보았다. 처녀가 남자의 상징처럼 목에 걸린 타이를 가지고 놀다니. 내게는 B의 행동이 남자의 상징을 조몰락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질투가 난 나는 B를 노려보았다. 그날 결혼식 파티에 온 그녀는 엉덩이를 전부 가리기에는 턱없이 짧은 원피스 차림이었다.거기에 빨간색 하이힐이라니.남자들을 한 방에 날려 보낼 핵
I는 거의 미동조차 없이 죽은 듯이 누워 있을 뿐이었다.아무리 팔을 뻗어도 그녀의 엉덩이를 만질 수가 없었다.I는 15㎝가 넘는 흰색 킬 힐을 신고 있었다.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백화점 명품관이었다. 모든 것이 얼어붙는 겨울 저녁이었다. 기상학자에 따르면 조만간 지구에는 소빙하기가 도래할 가능성이 있다. 지구온난화로 북극과 남극 빙하가 녹기 때문에 해수면이 급상승하고 있다. 그 여파로 극지와 저위도 지역 기후 사이에 불균형이 커지고, 고위도 지역의 기온이 크게 하락할 수 있다는 다큐멘터리가 이를 증언하였다. 어디까지나 다큐멘터리일
가련한 예술가씨. 무척 굶주렸겠군요. 내 방으로 와요.그 순간 E는 내게 엘도라도였다. 그녀는 황금이었다.그날 나는 로또복권을 사러 갔다가 우연히 E를 만났다. 그 전날 밤 꿈에서 황금 돼지를 보았던 터였다. 농장에 수천 마리 돼지가 우글거렸다. 생활비는 바닥나고 날마다 허기에 시달리던 참이었다. 나는 돼지저금통을 깬 즉시 복권판매소로 뛰어갔다. 꿈속의 돼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폐차 직전인 소형차를 쇼핑센터에 주차했다. 복권이 모두 팔렸으면 어쩌나 걱정을 하며 차 문을 여는데 E가 빨간 스포츠카에서 내리고 있었다.E의 금색 하이
늦은 밤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비가 내렸다. 가을비는 내리고 집 문밖에 한 여자가 우산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언뜻 보기에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줄 알았다. 인기척을 느낀 여자가 고개를 돌리자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비에 젖은 얼굴로 울고 있었다. 그녀는 한기 탓인지 어깨를 떨었다. 회색 통굽 하이힐을 신은 그녀 맨발이 젖어 들고 있었다.-제가 지금 갈 곳이 없어요. 난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오늘 밤만 당신과 지낼 수 있을까요?그녀의 이름은 C였다. 어처구니없지만 C는 내게 하룻밤을 같이 보낼 수 있는지
H는 노란색 하이힐을 신고 내게로 왔다.교통사고로 다리뼈에 금이 가는 상처를 입어 나는 정형외과 병실에 입원해 있었다. 죽음의 문 앞까지는 가 보지 못했지만, 병원 침대에서 오래 살다 보면 중환자가 따로 없었다. 떡 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넘기며 나는 깁스를 한 발목으로 절뚝이며 걸었다. 가끔 찾아오는 지인들은 별 도움이 되질 않았다. 무엇보다 가슴 한구석을 채운 허전함이 발목 통증보다 더 아프고 쑤셨다. 주삿바늘도 진저리나게 싫었지만 외로움은 더 견디기 힘들었다. 물론 간절히 원한다고 사랑이 찾아오리라 기대한 건 아니었다. 맨몸
겨울의 한 가운데로 봄이 멀리서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한다. 의문에 휩싸여 나는 겨우 내내 방구석에 처박혀 지냈다. 머리에 든 먹빛처럼 검은 물이 가라앉아 희뿌옇게 느낄 무렵이었다. 사십 년 동안 장복한 술이 사물과 사람에 관한 판단을 흐린 안개 속처럼 만들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남을 어찌 알겠는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게으른 나는 나에 대한 진단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에 대한 진단이라니. 아픈 질병이라면 병원에라도 가 보겠지만 이건 사지가 멀쩡하니 드러누워 망상에 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