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과 잔상의 시인 김종삼의 작품들이 캘리그라피로 다시 태어났다. 『캘리그라피로 읽는 김종삼-내용 없는 아름다움』은 캘리그라피 작가 오민준씨가 김종삼의 시들을 캘리그라피로 재현한 작품집이다.캘리그라피(Calligraphy)는 '아름답게 쓰다'는 뜻으로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아름다운 상형문자”라고 불렀다. 김종삼과 오민준이 만나는 곳도 바로 이 지점이다. ‘아름다움’이라는 미학적 세계에서 두 장르와 두 매개체, 그리고 두 예술가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 오민준은 상호 텍스트의 관계에서 볼 때 김종삼의 독자였다가 작가로 변신하
―한 모퉁이는 달빛 드는 낡은 구조(構造)의 大理石(대리석). 그 마당(寺院) 한 구석―잎사귀가 한잎 두잎 내려앉았다.-김종삼 ‘주름 간 大理石’ 전문▲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가 1971년에 녹음한 드뷔시 『영상』. 모노 시대 음반은 발터 기제킹의 연주를 첫손으로 꼽는다. ⓒ박시우김종삼이 드뷔시를 통해 추구한 시의 세계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인상파의 기법을 시작에 도입한 것입니다. 소리와 색채, 사물의 움직임을 음악으로 표현한 인상파처럼 김종삼의 시 곳곳에는 드뷔시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와 연관된 대표적인 시는 『현대문학』 1960년 11월호에 발표한 ‘주름 간 대리석’을 비롯해 ‘뾰죽집’ ‘북치는 소년’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주로 짧은 시에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이 시는 드뷔시의 피아노 작품 『영상』 제2집 중 제1곡 잎사귀를 스치는 종소리, 제2곡 황폐한 사원에 걸린 달이 연상됩니다. 첫 행에 문장부호 줄표를 표기한 것은 과감하게 생략한 전제를 환기시킨 의도로 보입니다. 줄표 너머는 언어로 포착하기 어려운 세계이면서 절제된 음악의 감흥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줄표를 문장부호가 아닌 악보의 덧줄로 해석하면 새로운 세계가 보입니다. 이 덧줄은 5선의 범위에 담을 수 없는 이미지를 함축시킨 김종삼의 음표이자 시 전체를 음화(音畫)로 바꾸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경우 ‘주름 간 大理石’은 인상파 기법으로 쓴 가장 성공적인 작품이 됩니다.인상파의 특징이 잘 나타나는 드뷔시의 피아노 독주곡은 『영상』 말고도 『전주곡』이 있습니다. 제1·2집 총 6곡이 수록된 『영상』과 제1·2권 총 24곡으로 구성된 『전주곡』의 특징은 첫째, 개별 곡들의 연주시간이 짧게는 2분대에서 길게는 6분대인 소품이라는 점 둘째, 개별 곡마다 시의 제목 같은 부제가 달려 있는 점 셋째, 음향과 회화 이미지로 가득 찼다는 점입니다. 『영상』에 비해 수록된 곡이 많은 『전주곡』에도 ‘들을 지나는 바람’ ‘소리와 향기가 저녁 대기 속에 감돈다’ ‘서풍이 본 것’ ‘아마빛 머리의 소녀’ ‘달빛 쏟아지는 테라스’ 등 시적 분위기가 넘치는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한 老人이 졸고 있었다몇 그루의 나무와 마른 풀잎들이 바람을 쏘이고 있었다 BACH의 오보의 主題가 번지어져 가고 있었다 살다 보면 자비한 것 말고 또 무엇이 있으리갑자기 해가 지고 있었다-김종삼 ‘留聲器’ 전문김종삼 시인이 1974년 3월 『현대시학』에 발표한 ‘유성기’입니다. 김종삼은 일본 유학 시절과 해방 후에는 한동안 유성기로 음악을 들었습니다. 축음기라고도 하는 유성기는 음색이 따뜻하고 고풍스럽지만 잡음도 많이 끓었습니다. 지글거리는 유성기 소리는 빗소리처럼 들리기도 하고 때로는 천식을 앓는 노인의 잔기침 같기도 합니다.이
스와니 江가엔 바람이 불고 있었다스티븐 포스타의 허리춤에는 먹다 남은술병이 매달리어 있었다날이 어두워지자그는앞서 가고 있었다영원한 江가그리운스티븐-김종삼 ‘스와니 江’ 전문동아일보 1973년 7월 7일자 신문에 발표한 시입니다. 김종삼은 서양 고전음악 못지않게 미국 민요 작곡가 스티븐 포스터의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포스터 민요에는 흑인 노예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데다가 빈곤과 고독 속에서 3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포스터의 생애가 김종삼의 감성을 사로잡았을 겁니다.김종삼은 사춘기 때 포스터의 노래를 듣고 짙은 감상에 빠져들었다
잔잔한 성하(聖河)의 흐름은비나 눈 내리는 밤이면더 환하다.-김종삼 ‘성하’ 전문『문학과지성』 1977년 봄호에 발표한 시입니다. 고백하건대 한동안 성하(聖河)를 성하(星河)로 오독한 적이 있습니다. 원문 그대로 성하(聖河)로 이해하면 신앙심과 연결된 성스러운 강물이나 삶과 죽음을 가르는 고대신화와 불교에 나오는 강으로 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저는 성하(星河)로 착각하고 은하수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시의 내용이나 분위기가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느껴서 그랬습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았지만, 성하(聖河)와
새 한 마린 날마다 그맘때한 나무에서만 지저귀고 있었다어제처럼세 개의 가시덤불이 찬연하다하나는어머니의 무덤하나는아우의 무덤새 한 마린 날마다 그맘때한 나무에서만 지저귀고 있었다-김종삼 ‘한 마리의 새’ 전문또 언제 올지 모르는또 언제 올지 모르는새 한 마리가 가까이 와지저귀고 있다이 세상에선 들을 수 없는고운 소리가 천체에 반짝이곤 한다나는 인왕산 한 기슭납작집에 사는 산 사람이다-김종삼 ‘새’ 전문김종삼 시인은 새를 주제로 두 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1974년 9월 『월간문학』과 1977년 1월 『심상』에 발표한 시들입니다.김종삼
여러 날 동안 여러 갈래의 사경을 헤매이다가살아서 퇴원하였다.나처럼 가난한 이들도 명랑하게 살고 있음을다시 볼 수 있음도익어가는 가을 햇볕과초겨울의 햇볕을 즐길 수도 있음도반갑게 어른거리는옛 벗들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음도主의 은총이다.-김종삼 ‘오늘’ 전문1983년 1월 『여성중앙』에 발표된 시입니다. 김종삼 시인이 병원에서 퇴원하고 쓴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무렵 김종삼은 오랜 폭음으로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종삼은 술을 먹으면 죽는다는 불치의 지병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마시겠다고 한 술
예수는 어떻게 살아갔으며 어떻게 죽었을까죽을 때엔 뭐라고 하였을까흘러가는 요단의 물결과하늘나라가 그의 고향이었을까 철따라옮아다니는 고운 소릴 내일 줄 아는 새들이었을까저물어가는 잔잔한 물결이었을까-김종삼 ‘고향’ 전문김종삼은 1973년 3월 『문학사상』에 이 시가 들어간 산문 을 발표합니다. 종삼은 가브리엘 포레의 에서 영감을 받아 이 시를 썼지만, 비하가 섞인 ‘넋두리’라고 말합니다. 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종삼은 예수에 대한 궁금증과 관심을 억누를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밝힌
두이노城(성) 안팎을 나무다리가 되어서다니고 있었다 소리가 난다 간혹 죽은 친지들이 보이다가 날이 밝았다 모차르트 銅像(동상)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에게 인간의 죽음이 뭐냐고묻는 이에게 모차르트를 못 듣게 된다고모두 모두 平和(평화)하냐고 모두 모두-김종삼 ‘對話(대화)’ 전문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리노스는 오르페우스와 더불어 음악의 신입니다. 헤라클레스에게 음악을 가르치다가 재능을 질투한 아폴로에게 요절을 당합니다. 에 리노스가 나오는데, 릴케는 리노스의 죽음이 허무한 현세를 음악으로 바꾸어놓아 황홀과 위로,
一八六五년 와이오밍 콜라우드산(山) 아래 뙤약볕 아래망아지 한 마리맴돌고 있다마부리 주었던 장신구(裝身具) 딩굴었다 흩어졌다 없어졌다다 죽었다 깔라꾸라 마부리 까당가 살았다 날마다 날개쭉지 소리 거칠다머얼리서 반짝일 때가 있다넓은 천지(天地) 호치카 먹는다-김종삼 ‘샤이안’ 전문김종삼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한 부족인 샤이엔에 대한 시를 몇 편 남겼습니다. 샤이엔은 백인과 맞서 싸웠던 용맹한 부족이었습니다. 시에 나오는 1865년은 남북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인 인디언 사냥이 시작된 상징적인 해이기도 합니다. 미국 중서부 대평원은 샤이엔
세자아르 프랑크의 음악(音樂) 은야간(夜間) 파장(波長)신(神)의 전원(電源)심연(深淵)의 대계곡(大溪谷)으로 울려퍼진다 밀레의 고장 바르비종과그 뒷장을 넘기면암연(暗然)의 변방(邊方)과 연산(連山)멀리는내 영혼의성곽(城廓)-김종삼 ‘최후(最後)의 음악(音樂)’ 전문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세자르 프랑크(1822~1890)스테판 말라르메(1842~1898)클로드 드뷔시(1862~1918)모리스 라벨(1875~1937) 잘 아시겠지만 19세기 프랑스 예술의 주요 인물로 김종삼 시인에게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종삼
아뜨리에서 흘러 나오던루드비히의주명곡(奏鳴曲)소묘(素描)의 보석(寶石)길…………………………한가하였던 창가(娼街)의 한낮옹기 장수가 불던단조(單調)-김종삼 ‘아뜨리에 환상(幻想)’ 전문김종삼은 그림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여러 편의 시에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아뜨리에는 종삼에게 동경의 공간입니다. 그 음악은 아뜨리에의 이젤에서 그려지는 소묘의 세계를 환상으로 인도합니다. 루드비히는 베토벤을, 주명곡(奏鳴曲)은 기악곡의 소나타를 말합니다.그러나 종삼의 두 눈은 어느 한가한 창가(娼街)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한 귀퉁이꿈나라의 나라한 귀퉁이나도향한하운 씨가꿈속의 나라에서뜬구름 위에선꽃들이 만발한 한 귀퉁이에선지그믄트 프로이트가구스타포 말러가말을 주고받다가부서지다가영롱한 날빛으로 바뀌어지다가-김종삼 ‘꿈속의 나라’ 전문구스타프 말러는 죽기 1년 전인 1910년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사를 만납니다. 평생 이방인으로 살아온 절망감, 수시로 엄습해오는 심장병과 죽음의 공포, 어린 딸의 죽음, 19살이나 어린 젊고 아름다운 아내 알마에 대한 집착 등이 말러를 괴롭혔습니다.말러는 프로이트에게 깊은 비극과 가벼운 즐거움이 서로 뗄 수 없이
머지않아 나는 죽을 거야산에서건고원지대에서건어디메에서건모짜르트의 프루트 가락이 되어죽을 거야나는 이 세상엔 맞지 아니하므로병들어 있으므로머지않아 죽을 거야끝없는 평야가 되어뭉게구름이 되어양떼를 몰고 가는 소년이 되어서죽을 거야-김종삼 ‘그날이 오며는’ 전문김종삼은 '그날이 오며는'에서 자기 죽음을 한편의 그림일기처럼 그리고 있습니다. 산에서나 고원에서나 모차르트의 플루트 가락이 될 거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 맞지 않고 병들어 있기 때문이며, 그날이 오면 끝없는 평야나 뭉게구름, 목동이 되어 죽을 거라고 고백합니다.이 시가 『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청계천변(川邊) 십전균일상(十錢均一床) 밥집 문턱엔거지 소녀가 거지 장님 어버이를이끌고 와 서 있었다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태연하였다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십전(十錢)짜리 두 개를 보였다-김종삼 ‘장편(掌篇)․2’ 전문 1975년 9월 『시문학』에 발표된 김종삼의 시 '장편(掌篇)․2'를 숙독하다 보면 거지 소녀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집니다. 밥집 주인의 고함에도 물러서지 않는 소녀의 자세는 의연합니다.생일을 맞은 장님 어버이에게 밥 한 끼 대접하려고 동냥으로 얻은 돈을 내미는 소녀의 이야기는 일제 식민
바닷가에 매어둔작은 고깃배날마다 출렁거린다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헤밍웨이의 바다와 老人(노인)이 되어서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사노라면많은 기쁨이 있다고-김종삼 ‘어부’ 전문 김종삼이 1975년 9월 『시문학』에 발표한 시입니다. 날마다 출렁거리거나 때로는 풍랑에 거꾸로 뒤집히기도 하는 작은 배는 시인의 삶입니다. 세파를 헤치고 멀리 노를 저어 나가려고 하는 어부는 시인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1연에 나오는 ‘바다와 노인’은 헤밍웨이 같은 결연한 의지보다는 소박한
하늘을파헤치는 스콮소리(중략)마음 한줄기 비추이는라산스카.-『현대문학』 1961.12 루-부시안느의 개인 길바닥.한 노인이 부는 서투른목관 소리가 멎던 날.-『자유문학』 1961.12 집이라곤조그마한 비인 주막집 하나밖에 없는초목(초목)의 나라수변(수변)이 맑으므로라산스카.-『현대시』 제4집 1963.6 라산스카늦가을이면 광채 속에기어가는 벌레를 보다가 라산스카오래 되어서 쓰러져가지만세모진 벽돌집 뜰이 되어서-『신동아』 1967.10 라산스카인간되었던 모든 추함을 겪고서작대기-ㄹ 집고서-『풀과별』 1973.7김종삼의 시 ‘라산스카’
日月(일월)은 가느니라아비는 石工(석공)노릇을 하느니라낮이면 大地(대지)에 피어난만발한 뭉게구름도 우리로다 가깝고도 머언검푸른산줄기도 사철도 우리로다만물이 소생하는 철도 우리로다이 하루를 보내는 아비의 술잔도 늬 엄마가 다루는 그릇 소리도 우리로다 밤이면 大海(대해)를 가는 물거품도흘러가는 化石(화석)도 우리로다 불현듯 돌 쪼는 소리가 나느니라 아비의 귓전을 스치는 찬바람이 솟아나느니라늬 棺(관) 속에 넣었던 악기로다넣어 주었던 늬 피리로다잔잔한 온 누리늬 어린 모습이로다 아비가 애통하는 늬 신비로다 아비로다늬 소릴 찾으려 하면 검
김종삼 시인은 어느 봄날,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의 소풍에 따라갔습니다. 종삼은 딸과 함께 점심을 먹은 뒤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어린 딸이 여기저기 찾아 헤맨 끝에 언덕에서 잠들어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가슴팍에는 큼지막한 돌 하나가 얹어져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딸이 물었습니다.“아버지, 왜 그래?”“응,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아서 그래.”종삼이 큰딸의 소풍에 따라가서 하늘로 날아 갈까봐 가슴팍에 돌을 올려놓고 잠들었던 일화입니다. 종삼의 장녀에 따르면, 당시 소풍 장소는 바위가 많은 수락산이었다고 합니다. 조용
公告(공고)오늘 講師陳(강사진)음악 部門(부문)모리스·라벨미술 部門(부문)폴·세잔느시 部門(부문)에즈라·파운드모두缺講(결강).金冠植(김관식), 쌍놈의 새끼들이라고 소리지름. 지참(持參)한 막걸리를 먹음. 교실내(敎室內)에 쌓인 두터운 먼지가 다정스러움.金素月(김소월)金洙暎 休學屆(김수영 휴학계)全鳳來(전봉래)金宗三(김종삼) 한 귀퉁이에 서서 조심스럽게 소주를 나눔. 브란덴브르그 협주곡 五번을 기다리고 있음.교사(校舍).아름다운 레바논 골짜기에 있음.-김종삼 ‘시인학교’ 전문 1973년도에 발표된 ‘시인학교’는 김종삼의 예술적 취향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