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자 수필가인 박경임 작가가 2024년 2월에 ㈜천년의시작에서 시집『붉은 입술을 내밀고』와 월간순수문학에서 수필집 『독기를 빼며』를 동시에 출간하였다.추천사를 쓴 이재무 시인은 이 시집을 두고 『붉은 입술을 내밀고』의 시적 화자는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여성으로, 비밀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기를 욕망하는 주체성을 지니고 있다. 이미 한풀 꺾여 버린 가능성은 쇠잔해져 가는 육체를 상기시키지만, 갈망과 현실의 괴리는 파도처럼 시의 리듬을 형성하며 상승과 하강 사이를 반복해 간다고 말한다.”시인의 이번 시집 속에서 내가 특별히 주목한
구석말 / 김미라 저 멀리 뿌옇게 흐린 안갯길에 한 사람이 걷고 있다. 언덕을 넘어오는 사람인지, 넘어가는 사람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안개는 짙다. 흑백사진의 매력이란 이런 것일까. 그녀가 보낸 초대장에 실린 조그만 사진 한 장이 내 마음을 잡아끌었다. 이제 막 예술의 길에 접어든 친구의 개인전에 다녀왔다. 4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다가 퇴직한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은행원이었던 그녀는 정년을 맞이하여 자신의 인생과 앞날에 대한 깊은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진짜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 얼마나 행복
오버 투어리즘 / 김주선 한적한 시골 마을에 대형 버스 한 대가 들어온다. 한국에서 온 듯한 한패가 주차장에 내리자, 온 동네가 왁자지껄하다. 저들도 버스 안에서 가이드가 떠드는 한류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을 듣고 왔겠지. 패러글라이딩을 타던 중 돌풍을 만난 사고로 북한에 불시착한 남한의 재벌 상속녀와 북한 장교의 러브스토리를 말이다. 남자 주인공은 호숫가 부교浮橋 위에서 피아노를 치고, 여주인공은 페리를 타고 부두로 들어오다가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 드라마의 결말이기도 한 이 장면을 촬영한 곳이 바로 이젤발트다. 1년에 한 번 휴
수레바퀴 꼬마 도둑 / 김주선 엄마의 지갑에서 동전 한 닢 손댄 적 없던 내가 이종사촌 오빠의 책장에 손을 댄 적이 있었다. 중학생일 무렵 여름방학 때 원주에 사는 이모네 집에 놀러 갔다가 맘껏 책을 읽을 수 있는 오빠가 부러웠다. 소아마비를 앓고 있어 책 읽는 일로 소일하던 오빠였다. 아마도 내가 앙큼한 책 도둑인 걸 알았을 것이다. 돌려줘야지 생각은 했지만, 물놀이 사고를 당해 이모의 가슴에 묻히는 바람에 책은 본의 아니게 유품이 되었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를 볼 적마다 술에 취한 채 강가를 걷다가 물에 빠져 의문
타자의 아픔을 응시하다 『계간현대수필』 2023 여름호 월평 - 작가 이문자 타인의 감정과 상황에 공감하여 자신을 일깨우는 감성은 작가가 지녀야 할 필수 자질인지도 모른다. 『계간현대수필』 여름호에선 김주선의 「현주를 기다리며」와 박복임의 「겨울 꽃」을 주목하게 된다. 이들 작품은 타자의 시련을 자신의 아픔으로 공유하면서 스스로를 채근하고 격려한다.수개월 절필을 선언한 채 “빈둥빈둥 티브이 리모컨을 쥐고 살”던 김주선 작가. “머리를 쥐어뜯어도 내 글은 신선하지 않고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다”는 화자는 구필口筆작가 이현주를 만나야겠다
꽃잎과 칼끝의 대결, 그 ‘착란의 변증법’ 『한국산문』 9월호 월평 오정주 우리 인생의 꽃잎은 칼끝에서 한순간 스러지기도 하고, 영혼이 불타올라 더 많은 꽃잎을 피우기도 한다. 세찬 바람에 흩어지지 않으려면 위기의 순간을 잘 버텨내야 한다. 현대인들은 어떤 황당한 고민일지라도 윤리적인 문제와 현실적인 갈등의 칼끝에서 선택을 종용당하는 착란의 상태에 처하기도 한다. 어떻게 극복하는 게 현명한 방법일까? 『한국산문』 9월호에 실린 김주선의 『바둑 두는 여자』와 박지니의 『두 여자 사랑하기』는 인기 드라마와 소설을 읽고 그 의미를 촘촘하
블로그를 지우며 / 김주선 단풍나무 이파리가 파닥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비가 제법 내리는 주말, 꿀맛 같은 낮잠이었다.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개인 웹 사이트를 정리하고자 컴퓨터를 켰다. ‘나도 너처럼 장미였노라’ 블로그 대문을 장식하는 헤드라인 문구에 먼지가 낀 듯 침침하게 보였다. 돋보기를 꺼냈다. ‘나도 장미였던 시절이 있었노라. 누군가의 가슴에 선홍빛으로 핀 장미였던 시절이.’ 블로그에 적힌 한 줄 소개 글이 무색하리만치 온기를 잃은 방은 적막이 가득했다.나는 블로거였다. 초창기에는 주로 라이프, 요리, 여행을 다루었다.
바둑 두는 여자/김주선 한때 프로 바둑이 인기였던 시절이 있었다. 재능이 보이는 진득한 남자애들은 학원까지 보내주었지만, 언감생심 여자애들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어깨너머로 한 수 배운 아이들은 사랑방 전용 반상을 펴고 어설프게 집 짓기 놀이를 했다. 고만고만한 실력인데도 또래들은 행마의 규칙을 알려주는 훈수를 뒀다. 귀(귀퉁이)부터 돌을 놓는 애들은 초가집 정도는 지을 줄 아는 편이고 정중앙부터 포석을 치는 아이는 바둑을 1도 모르는 아이다. 바둑 좀 두는 집안에서는 아이들의 실력과 흥미를 키워주느라 화점 위에 9점을 깔아주고
현주를 기다리며 /김주선 은행거래만 터도 달력을 주던 때와 달리 작년 연말은 달력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다. 종잇값과 제작비가 올라 발행 부수를 대폭 줄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의 푸념을 들었던지 어느 미술협회에 후원금을 지원하는 여고 후배가 탁상용 달력을 우편으로 보내왔다. 달(月)에 어울리는 꽃과 풍경을 그린 달력이었다. ‘구족회화(Mouth and Foot Painting Artists)’라는 작품설명을 보고 나니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가 머릿속 주머니에서 뾰족하게 뚫고 나왔다. 십여 년도 넘은 일이지만, 언젠가 내 고향 신문
뒷모습 초상화 / 김주선 아버지 장례식 때 쓰인 영정 사진은 초상화였다. 그것도 양복이 아닌 흰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오십 줄의 중년 모습이었다. 증명사진을 확대해 영정으로 사용해도 되었지만, 아버지는 생전에 염원하던 자기 모습을 영정 초상화로 제작해 놓으셨다. 마치 흑백사진인 듯 콧수염 한 올 한 올이 실사처럼 보였다. 아주 오래전 윤중로에 벚꽃 구경을 하러 갔다가 남자친구와 나란히 캐리커처 모델이 된 적이 있었다. 그림을 그려 준 이는 남자친구의 고향 선배였다. 벚꽃 시즌 동안 여의도에서 아르바이트한다며 접이식 의자에 우리를
가을 멍게젓 / 김주선 포항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지인이 제로데이 택배로 횟감을 보냈다. 분당에 있는 종합 버스 터미널 수화물 보관소로 향한 것은 정오였다. 4시간 이상 장거리 배송을 감안해 아이스팩으로 채워진 수화물 상자를 받아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멍게는 껍질이 단단하고 큼직한 놈으로 예닐곱 마리쯤 될까. 탱탱한 돌기 부분을 잘라 낸 다음 살과 껍질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살을 돌려 빼냈다. 빨리 섭취하지 않으면 버리게 될 판이어서 ‘에라 모르겠다 젓갈이나 담가 보자’라는 실험 정신에 빛나는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비싼 해삼은
탕기영감 /김주선 식전바람에 거래처 사장의 부고를 받은 남편은 밥술을 뜨기도 전에 조문 복장부터 차려입었다.“아버지 같은 분이셔. 당신도 알지? Y 철강 김 사장님”이 말인즉슨 당신도 따라나서야 하니 어서 준비하라는 뜻이었다. 상주라도 된 양 상심한 모습으로 수저도 들지 않고 허둥대는 그를 보며 나는 간단한 요깃거리를 주섬주섬 담아 화장기 없는 얼굴로 따라나섰다.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경기도 광주의 한 국도로 접어들었다. 주변에 크고 작은 공장건물이 즐비했다. 그중에 몇 채의 건물을 가리키며 그를 회상하고 나름의 애도를 표시했다. 왜